[김건수의 지금 여기] 세상을 바꾸는 배우들의 한마디
논설위원
K드라마가 또 하나의 이정표를 세웠다. 엊그제 날아든 원로배우 오영수의 골든글로브 남우조연상 수상 소식을 말하는 것이다. 미국의 골든글로브는 비영어권 작품에 대단히 배타적이다. 인종차별적이라는 비판을 받은 게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동양의 배우가 백인 중심의 보수적 관행에 균열을 냈다는 사실은 그래서 그 자체로 기념비적이다. ‘오징어 게임’의 골든글로브 수상에 외신들이 잇단 찬사를 보내는 것도 그런 이유일 것이다. 골든글로브는 아카데미 4관왕에 빛나는 영화 ‘기생충’도, 배우 윤여정이 아카데미 연기상을 받은 영화 ‘미나리’도 밟아보지 못한 높은 문턱이었다.
그래서인지는 모르겠으나 오영수 배우가 남긴 수상 소감은 큰 울림으로 다가온다. 그는 “생애 처음으로 내가 나에게 ‘괜찮은 놈이야’라고 말했습니다”라고 밝힌 데 이어 “이제 ‘세계 속의 우리’가 아니고 ‘우리 속의 세계’입니다”라고 벅찬 심정을 피력했다. ‘바깥’이나 ‘세상’이 아닌 ‘마음’ 혹은 ‘우리’가 중심이라는 선언. 이건 중앙-변방, 지배-종속이라는 대립의 관점이 아니다. 주체에 대한 진정한 발견이면서 나아가 중심 없는 중심, 곧 다양성에 대한 열린 시선의 의미로 읽을 만하다.
오영수 골든글로브 수상 소감
“이제 우리 속 세계” 큰 울림
2017년 공로상 수상 배우
메릴 스트리프 감동 발언 재조명
권력의 배타주의 속성 경계
언론·유권자 감시 기능 일깨워
솔직히, 골든글로브가 배타적이든 차별적이든 그게 무슨 상관인지 모르겠다. 그들의 영화(드라마) 시상식은 그들이 알아서 할 일이니까. 다만 골든글로브를 거쳐 간 배우들의 수상 소감만은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그 자리에 오르기까지 동고동락한 은인들에 대한 감사와 함께 진심 어린 자신의 소신을 피력하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그때, 상은 가치를 아는 사람에게만 주어진다는 걸 새삼 깨닫게 된다. 특히 용기 있는 배우들의 발언은 오랜 세월이 흘러도 회자되곤 한다. 그중에서도 2017년 골든글로브 평생공로상을 받은 할리우드의 명배우 메릴 스트리프의 수상 소감을 백미로 꼽는 이들이 많다.
한국의 대통령 선거가 얼마 남지 않은 시점에서 그 얘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당시 5분 30초 동안의 발언에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메시지가 모두 담겨 있어서다. 그는 시상식 현장에 나온 여러 배우들의 출신지와 성장 배경을 일일이 거론하면서 다채로운 면면을 이야기했다. “이렇게 할리우드는 다양한 아웃사이더와 외국인들로 들끓는 곳입니다. 이들을 다 쫓아내면 미식축구와 격투기 외에는 아무것도 보지 못할 것입니다.” 당시 출범을 앞둔 트럼프 정부의 배타주의와 이민 정책을 꼬집은 말에 박수가 쏟아졌다. 다음날 새벽 4시, 트럼프 대통령은 ‘분풀이’ 트위트를 날린다. ‘할리우드에서 가장 과대평가된 여배우.’ 하지만 메릴 스트리프의 위상이 깎이기는커녕 한층 도드라졌을 뿐이다.
이 배우의 용기는 ‘권력’에 관해 말할 때 더욱 빛났다. “혐오는 혐오를 부르고 폭력은 폭력을 선동합니다.” “권력을 가진 자가 타인을 괴롭히기 위해 제 지위를 이용할 때 우리는 모두 패배할 것입니다.” 권력에 맞서 공정한 사회를 소망한, 정치적이면서도 따뜻하고 아름다운 연설이었다. 대권을 꿈꾸는 한국의 대선 후보들이 마땅히 귀 기울일 만하다.
그런데 참 아이러니한 일이다. 최근 개봉한 영화 ‘돈 룩 업’에서 메릴 스트리프는 자기중심적인 대통령 역을 맡았다. 영화는 거대한 혜성과의 충돌로 지구 종말의 위기를 맞는 상황에서 주판알만 튕기는 정치인, 기업인, 언론을 풍자한 블랙코미디다. 재선을 노리는 대통령은 6개월 뒤 혜성이 지구와 충돌한다는데도 중간선거 걱정만 하고, 거대 기업의 회장이라는 사람은 혜성에 매장된 광물을 채취해 돈 벌 궁리만 한다. 어쩐 일인지 트럼프 전 대통령의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듯하다.
과학이 정치와 자본에 휘둘릴 때 객관적 진실은 실종될 위험성이 크다. 영화 속에서 탐욕스러운 정치 엘리트들은 날아오는 혜성이 육안으로 뻔히 보이는데도 ‘보지 말라(don’t look up)’는 구호로 진실을 호도한다. 그렇게 여론은 극단적으로 갈린다.
우울한 일이지만, 이 땅의 현실이 이와 결코 다르지 않다. 정치는 한 편의 쇼처럼 변질돼 있다. 보여 주기식 이벤트 앞에서 권력이 얼마나 위험한지는 쉽게 가려진다. 권력은 기본적으로 위험한 것이다. 권력을 가진 자들이 욕망의 노예가 될 때, 그 욕망이 반대자들에 대한 차별과 배제, 나아가 절멸에의 의지를 품고 있을 때 권력은 폭주한다. 그래서 권력자가 자신의 욕망에 패배하지 않도록 감시하는 존재가 필요한 것이다. 그건 언론일 수도 있고 유권자의 매서운 눈일 수도 있다.
어쨌거나 트럼프는 권좌에서 물러났고 메릴 스트리프는 여전히 ‘명불허전’의 연기를 펼치고 있으니, 과연 ‘권력은 짧고 예술은 길다’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kswoo333@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