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북 단상] 악랄하고 치졸한 '스토킹'…그리고 막지 못한 죽음
이대성 사회부 경찰팀장
2010년 3월 어느 날의 일입니다. 사회부 경찰 기자로 부산의 한 경찰서를 출입하고 있었습니다. 그날도 새벽 시간 경찰서로 출근해 전날과 당일 새벽 발생한 사건·사고를 챙겼습니다. 당시 5년 차 경찰 기자로 많은 사건·사고 현장들을 때론 눈앞에서, 때론 먼발치에서 지켜봤습니다. 하지만 그날 한 여성의 죽음은 안타까움과 분노로 인해 가슴 한 편에 오롯이 남았습니다.
20대 후반의 여성 A 씨. 그녀는 그날 새벽 극단적인 선택을 했습니다. 출동했던 형사과 당직팀은 보고서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결별 요구에도 남자 친구로부터 지속적인 괴롭힘을 당해 이를 비관한 것으로 추정….’
“가해자를 처벌할 수 없느냐”는 물음에 당직팀장은 “쉽지 않을 것”이라고 답했습니다. 망자의 한이 느껴졌지만,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었습니다. A 씨의 죽음에 대한 두 문장짜리 짧은 기사를 쓰는 것 말고는요. 그리고 그 기사는 그녀의 죽음을 알린 유일한 기사로 남았습니다.
며칠 뒤였습니다. A 씨의 부친이 고소장을 들고 <부산일보>에 찾아왔습니다. 고소장은 곧 제게 전달됐습니다. 고소장을 찬찬히 훑어봤습니다. 고소장을 읽어 내려가는 내내 화가 치밀었습니다.
고소장에 따르면 A 씨의 남자친구 B 씨는 A 씨의 결별 요구에도 5~10분마다 누구와 무엇을 하는지 전화로 감시했습니다. B 씨는 A 씨에게 “전화 안 받으면 너희 집으로 전화한다. 네가 취직하려는 회사에 글 다 띄운다. 개 같은 X 경찰서에 또 신고해라 쓰레기 같은 X아” 등 하루 수십 통의 문자 메시지를 보내며 괴롭혔습니다. A 씨는 두려움에 B 씨를 떨쳐내지 못했고, 수시로 성폭행도 당했습니다. A 씨는 휴대전화 번호를 바꿨습니다. 하지만 B 씨는 A 씨의 번호를 알아내기 위해 A 씨 친구들을 겁박했고, A 씨의 집에 찾아가 A 씨와 어머니에게 욕설과 폭행을 일삼았습니다. A 씨는 벗어날 길이 죽음밖에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누구보다 아름다운 청춘을 보내야 할 A 씨는 그렇게 세상을 떠났습니다. 유서에는 ‘절대 죽어서 용서 안 한다. 너 때문에 죽는다’고 남겼습니다.
유족은 B 씨가 A 씨를 죽음으로 내몰았다며 ‘위력에 의한 촉탁살인죄’로 처벌해달라고 검찰에 고소장을 제출했습니다. 고소건은 경찰로 이첩됐습니다. 담당 수사관은 “협박, 폭행 등이 죽음에 이르게 했다는 걸 증명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A 씨의 죽음은 그렇게 잊혔습니다.
5년이 흘렀습니다. 지인을 통해 유족의 소식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지인은 A 씨의 남동생과 친구 사이였습니다. 지인은 “B 씨는 처벌을 받지 않았다”고 말했습니다.
생각해봅니다. ‘당시 스토킹 처벌법이 있었다면 어땠을까’라구요. A 씨가 법의 보호를 받았다면 죽음의 문턱까지 내몰렸을까요. B 씨가 법의 심판을 받지 않았을까요.
지난해 10월 스토킹 처벌법이 시행됐습니다. 스토킹 피해를 막을 기본적인 보호막이 마련됐다는 점은 크게 환영할 만한 일입니다. 하지만 보호막은 여전히 얇습니다. 경찰이 가해자를 신체적으로 더욱 강력하게 구속할 수 있고, 피해자는 더욱 완벽하게 보호돼야 합니다. 우리 사회에 ‘스토킹’이라는 악랄하고 치졸한 범죄가 사라지는 날을 기다립니다. nmak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