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뻘밭서 피워 낸 구순 ‘항칠 할매’의 희망 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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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에 위축될 필요가 없다. 아흔 넘은 할머니가 코로나19 덕(?)에 그림책까지 낸 걸 보면 그렇다.

(호밀밭)는 91세의 정석조 할머니가 온기 가득한 그림을 직접 그린 128쪽 그림책이다. 할머니가 ‘항칠하기’ 위해 색연필을 들었던 것은 코로나19 때문이다. 부산 해운대에 살면서 ‘영도의 단골 절간’에 다녔는데 코로나 확산 이후 ‘방콕’하면서 난생처음 그림을 그리게 됐다는 거다.

그림이 예사롭지 않다. 사람들이 “따뜻한 마음이 그대로 느껴지는 보통 그림이 아니다”라며 “추사와 피카소 뺨치는 그림”이라는 ‘과장 반응’까지 보일 정도다.

그림책 ‘아흔에 색연필을 든…’
91세 정석조 할머니 최근 출간
미술교사 막내딸 권유로 그림 시작
청사포 소나무·꽃·나비·풍경 등
장남 장희창 전 교수 SNS 올려
온라인 뜨거운 반응… 2월 전시회

이 그림책은 어머니를 생각하는 자식 마음에서 비롯됐다. 처음에 2남2녀 중 미술 교사인 막내딸이 ‘집콕’하는 어머니에게 밑그림이 그려져 있는 꽃 그림을 그려보라고 권했다. 손을 덜덜 떨면서도 예쁜 색을 골라 칠했는데 그러다가 노모는 직접 스케치도 하고 그림도 그리기 시작했다는 거다. 모전여전(母傳女傳), 미술 교사 딸의 솜씨가 어디서 나왔겠는가.

장남인 장희창 전 동의대 교수도 어머니 그림을 유심히 보기 시작했다. “소나무를 한 잎 한 잎 그린 청사포 소나무 그림을 보고서 저는 단박에 저건 그림이 아니고 어머니께서 70년간 해온 바느질, 그 노동의 흔적이라고 생각했어요.”

장 교수는 노모의 작품을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SNS)에 올렸고 사람들의 반응은 뜨거웠다. “나비를 이렇게 아름답게 그리시다니 마음속에 나비가 살고 있었나 봅니다, 춤추는 나무 말하는 그림이네요, 자연을 끌어안으셨네요, 그림에 몰입하는 동안의 환한 내면이 화면에 가득합니다….”

장 교수는 사람들의 반응을 통해 “동시대를 힘겹게 살아가는 이웃에 대한, 어려운 시대를 건너온 어머니들에 대한 공감의 시선”을 느꼈다고 한다. 아니 “그림의 색채란 공생과 조화의 산물이며, 그림이란 보는 사람의 느낌과 그리는 사람의 마음 만남”이란 걸 체험했다고 한다.

그렇게 아들을 통해 사람들과 소통하면서 구순의 노모는 ‘코로나 시대’ 2년간 그림을 그리고 또 그렸다. 집의 화분들과 꽃도 그렸다가, 아파트 봄 풍경도 그렸고 나중에는 장안사 풍경과 장산 대천 호숫가, 휴가 간 지리산 칠불사 계곡도 그렸다. 또 80년 저쪽 경북 영천의 어릴 적 고향 풍경도 그렸으며, 꽃과 부처의 모습이 한데 어울린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남편의 무덤에 직접 그린 국화 그림을 가져가기도 했다.

책에는 할머니의 말이 있다. “내 나이 90에 내 손으로 그려놓은 그림을 보고 있스며(있으면) 조금은 마음이 평화롭다.”(39쪽) “살면서 나를 위해 뭔가를 해 본 적이 없었는데 이제야 나를 위해 뭔가를 하고 있으니 행복하다.”(123쪽)

이 그림책은 ‘코로나 뻘밭’에서 피어오른 ‘희망의 연꽃’ 같다. “연꼿(꽃)은 뻘밧태에서도(뻘밭에서도) 아름다운 몹씁을(모습을) 드려낸다(드러낸다) 나도 연꼿처럼 사다가(연꽃처럼 살다가) 생을 ??처슴 좋겟다(마쳤음 좋겠다).”(52쪽)

할머니는 희망을 말했다. “아무리 코로나 시대라고 해도 우리 이웃들도 모두 힘내서 열심히 건강하게 살았으면 합니다.”

한편, 2월에 항칠 할매의 첫 전시회도 예정돼 있다고 한다.

최학림 선임기자 theos@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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