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물썰물] 약사청 복원
1392년 조선이 개국하자마자 태조는 의료에 대해 중요한 결정을 내렸다. “의관은 귀천을 막론하고 병을 신고하러 오면 바로 가서 치료해야 한다. 만일 가지 않으면, 누구든지 이 사실을 고발해 엄중히 법으로 다스린다”는 내용이었다. 백성의 의료권을 보장하는 정책 방향은 <경국대전>에서 법제화로 이어졌다.
이어 국가재정이 투입되는 공공의료기관이 세워졌다. 수도 한양의 혜민서와 활인서 설립이 대표적이다. 혜민서가 일반 백성의 질병을 담당하는 서민진료기관이라면, 활인서는 무의탁 병자를 수용하고 전염병이 돌 때면 임시로 병막을 지어 환자의 간호를 담당했다. 환자가 죽으면 묻어 주는 일도 활인서의 몫이었다.
사극 드라마에도 자주 등장하는 혜민서는 예나 지금이나 전염병 감염 위험이 상존하고, 가난한 환자들이 몰려들어 운영이 쉽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오죽했으면 다산 정약용은 저서 <경세유표>에서 “혜민서의 재정이 빈약해 임무를 제대로 수행할 수 없다”면서 “피폐한 현실을 방임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할 정도였다. 조선 후기에 크게 유행했던 전염병도 공공의료체계에 골칫거리였다. 콜레라로 인한 사망자가 1859∼60년에는 40만 명, 1895년에는 30만 명에 이를 정도였다. 이외에도 장티푸스, 두창, 이질, 성홍열까지 상상을 초월했다.
조선 시대 동래에는 혜민서와 같은 공공의료 역할을 동래 동헌 내에 약사청이 담당한 것으로 보인다. 동래는 조선 후기 200년 이상 최접경 지역 군사요충지로서, 조선통신사와 초량왜관 관리 등 외교 업무까지 맡아 대규모 시설이 많았다. 1795년 당시 56개의 주요 건물과 141개의 부속 건물이 있었다. 동래부사 집무실인 동헌 정청 충신당 북쪽에 위치한 약사청은 진상 약재를 감독하고, 백성을 위한 약을 처방·제조한 것으로 전해진다. 하지만, 약사청은 일제강점기에 식민통치 걸림돌 제거 차원에서 객사, 군영, 향청 등과 함께 완전히 해체됐다.
최근 부산 동래구청이 ‘동래부 동헌 약사청’ 복원 사업을 본격 추진한다는 반가운 소식이다. 약사청 복원은 동래부 동헌 정비 종합계획의 일환으로, 옛 모습을 구현하는 구심점이 될 전망이다. 예상보다 빠른 오미크론 확산으로 코로나 확진자가 하루 1만 3000여 명에 이를 정도로 역병의 기세가 꺾이지 않고 있다. 약사청 복원이 “나라의 근본인 백성의 병을 구제하겠다”는 조상의 마음과 취약계층 공공의료의 가치를 되새기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이병철 논설위원 peter@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