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탐정 코남] #12. 부산의 기묘한 지하철역, 직접 가봤습니다 (feat. 지하 9층 만덕역 걷기)
부산의 모든 궁금증을 직접 확인하는 '맹탐정 코남'입니다. 황당하고 재미있는 '사건·사고·장소·사람'과 언제나 함께하겠습니다.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를 한 발짝 물러서서 들여다보겠습니다. 진실은 언제나 여러 가지. 유튜브 구독자분들의 많은 제보 기다리겠습니다.
<사건개요>
인터넷 커뮤니티에 한 장의 사진이 올라왔다. 제목은 '부산 던전 입구'. 거대한 시멘트벽, 마치 성처럼 보이는 옹벽에 도시철도 입구가 뻥 뚫려 있다. "영화에 나오는 비밀 통로 같다" "진짜 이런 곳이 있느냐" 등 호기심 반, 의심 반 댓글이 이어진다.
사실 아는 사람들은 다 안다. 바로 부산 도시철도 2호선 '가야역' 입구라는 것. 이외에도 타지역 사람들 눈에는 신기한 부산의 도시철도역이 꽤 많다. 무려 지하 9층 깊이에 자리 잡은 만덕역, 아무도 이용하지 않는 수상한 통로가 있는 범내골역, 그리고 앞서 소개한 던전(괴물 소굴) 입구에 비유된 가야역 등. 맹탐정이 직접 부산 도시철도역에 숨겨진 이야기들을 추적해봤다.
<현장검증>
'범내골'? 이름부터 '범'상치 않다
부산 도시철도는 특이한 이름을 가진 역이 많기로 유명하다. 대표적으로 도시철도 3호선 미남역. 명칭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의견이 존재하는데, 확실한건 美男은 아니다. 가장 지지를 많이 받는 '썰'은 금정산 남쪽에 있기 때문에 美南이라고 이름 지어졌다는 게 유력하다. 참고로 2호선 냉정역은 냉정한 역이 아니라 역 근처 우물에서 딴 차가운 우물이라는 뜻의 냉정이다.
1호선에는 '범'자가 들어간 역이 있다. 바로 범내골, 범일동역이다. 무슨 뜻일까? 이 역들의 이름은 호랑이를 가르키는 순우리말 '범'에서 따왔다.
놀랍게도 1900년대 초까지 이곳에는 범이 자주 출몰했다고 한다. 인근 수정산에서 발원된 하천을 따라, 골짜기를 따라 범이 어슬렁거렸던 곳. 그래서 범내골이다. 2022년 임인년을 맞아 대합실, 승강장 곳곳이 범으로 장식되어 있다. 역명의 기원 등 한 번쯤 발걸음을 멈춰 읽어볼 만한 이야기들도 쓰여있다.
어둠 속 비밀통로의 정체는?
소설 해리포터 속 런던 킹스크로스역에는 '9와 3/4 승강장'이 등장한다. 호그와트행 열차를 탈 수 있는 비밀 관문으로 9번과 10번 승강장 사이 벽을 뚫고 들어가야 한다. 소설엔 미치지 못하지만, 범내골역에도 특이한 공간이 있다. 대합실 7·8번 출입구 방향, 개찰구 왼쪽으로 어두컴컴한 통로가 있다. 범내골을 자주 이용하는 시민들도 이 공간의 정체를 알지 못했다. 열차를 탈 수 있는 곳도 아니고 화장실이 있는 곳은 더 아니다. 성인 두 명이 나란히 걸어가기도 좁은 공간. 10m 남짓한 통로를 따라 들어가 보니 유리문이 있는데 잠겨 있다. 어떤 용도로 만들어진 공간일까?
해답은 가까운 곳에 있었다. 2014년 범내골역에서 사회복무요원으로 근무한 이민재 씨는 해답을 알고 있었다. 그는 현재 부산일보 인턴으로 현장에 동행했다. 민재 씨는 "이 통로를 따라가면 부산교통공사 지하로 연결된다"며 "높은(?) 사람들 안내할 때 딱 한 번 이용한 적 있는데 꽤 길었던 것으로 기억한다"고 으스대며 말했다. 범내골역과 부산교통공사와의 거리는 약 300m다. 기회가 되면 꼭 한번 걸어보고 싶다.
잡상인들의 베이스캠프?
맹탐정의 주관이지만 유독 1호선에는 잡상인들이 많다. 화려한 언변과 쩌렁쩌렁한 발성으로 승객들을 이목을 끈다. 당장 필요하진 않지만, 사두면 언젠가는 쓸 것 같은 묘한 물건을 판다. 민재 씨에 따르면 잡상인들의 본거지가 바로 이 범내골역이라고 한다. 그는 "범내골역 근처 잡상인들이 물건을 받아오는 사업체의 본부(?)가 있다"며 "범내골은 섬식승강장이라 노포동으로 가기도 반대편인 다대포로 가기도 좋다"고 말했다. 섬식승강장은 승강장을 가운데 두고 열차가 마주 보며 지나가는 승강장을 말한다. 승강장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철도 이용객 수를 파악한 후 눈치껏 업장(?)을 고른다는 것. 잡상인을 취재하려면, 범내골역에서 뻗치기를 해야 한다. 새로운 사실을 알았다.
벽 안에 박혀있는 출입구, 가야역
도시철도 2호선 가야역. 다른 지역 사람들이 가장 놀랄만한 도시철도 입구가 아닐까? 회색빛 옹벽이 압도적인 기세로 서 있다. 높이는 10m가 넘는다. 옹벽을 따라 걷는 사람들이 한없이 작아 보인다. 옹벽의 가로 길이는 무려 400m 이상이다. 아마도 부산 도심에서 볼 수 있는 가장 큰 옹벽이 아닐까? 이 옹벽에 출입구가 뚫려있다. 영화나 게임에서 괴물들이 쏟아져 나올 것 같은 '던전' 입구 같은 느낌이 든다.
이런 식으로 뚫려 있는 출입구는 두 개로 1번과 3번 출입구다. 부암역에 가까운 곳이 1번이다. 먼저 3번 출입구를 통해 들어가 봤다. 왼쪽엔 도시철도 대합실로 가는 계단이 아래로 이어진다. 1번 출입구로 갈 수 있는 계단도 있다. 여기까진 평범하다. 문제는 오른쪽, 위쪽으로 계단이 또 있다. 올라가 보니 옹벽 위로 통한다. 옹벽 꼭대기에 또 하나의 3번 출입구가 뚫려 있다. 정리하면 옹벽 아래와 위. 3번이라는 번호가 붙은 출입구가 두 개인 셈이다.
왜 이렇게 만들어졌을까?
정답은 생각보다 간단하다. 부산은 산이 많기 때문이다. 산복도로 위에 빼곡히 자리 잡은 집들은 부산에서만 볼 수 있는 이색적인 풍경이다. 언덕 위에 마을이 들어섰고, 이곳 주민들의 불편을 덜기 위해 옹벽 속을 파내어 도시철도로 이어지는 출입구를 만들었다. 만약 옹벽 위 출입구가 없었다면 주민들은 도시철도를 타기 위해 옹벽을 멀리 둘러서 내려가야 한다. 상상만해도 무릎이 쑤신다.
옹벽 아래를 지나다니는 시민을 위해 3번 출입구를 또 뚫었다. 물론 걷기 힘든 주민들을 위해 엘리베이터도 설치되어 있다. 당연히 옹벽 속 계단을 이용해 올라오는 사람보다 엘리베이터를 타는 사람들이 훨씬 많다. 그런데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사용하는 사람들이 많다 보니 자주 고장이 나서 주민들의 불만이 많다고 한다.
아파트 23층 높이만큼 땅속에 있는 지하철역
우리나라에서 가장 깊은 철도역이 부산에 있다. 바로 도시철도 3호선인 만덕역. 무려 그 깊이만 64.25m. 아파트로 따지면 21~23층 높이. 아파트 한 채 높이만큼 땅속에 있다고 생각하면 편하다. 깊이가 남달라서일까? 다른 역들과는 달리 대합실부터 이색적이다.
개찰구를 통과하자마자 엘리베이터 5대가 눈을 사로잡는다. 에스컬레이터나 계단을 찾아봐도 쉽게 눈에 보이지 않는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B9 층을 눌렀다. 다른 버튼은 눌러지지도 않았다. 30초 정도? 내려간 후 승강장에 도착했다.
9층 만덕역을 계단으로 올라가 봤다
승강장에 도착하니 만덕역 안내도가 눈에 들어왔다. 안내도를 살펴보니 에스컬레이터와 비상계단이 눈에 들어왔다. 9층 깊이의 도시철도 계단은 어떻게 생겼을까? 역무원의 협조를 구한 뒤 직접 비상계단으로 들어가 봤다. 계단이 있는 공간은 생각보다 크고 넓었다.
역무원에 따르면 비상시를 대비해 항상 불을 켜둔다고 한다. 표시는 9층으로 되어 있지만 한 개 층이 아파트 2~3층 높이다. 계단의 폭도 넓고 경사도 생각보다 높은 편이다. 비상상황을 가정하고 승강장에서 대합실까지 계단으로 얼마나 걸리는지 올라가 봤다. 개인 체력에 따라 다르겠지만 8분 정도 걸렸다. 2014년 소방훈련 결과 소방관이 지하 9층 깊이에 도달하는 데 7분이 걸렸다고 한다.
비상시엔 어디로 탈출해야 하나?
일어나서는 결코 안될 일이지만, 만덕역 승강장에서 비상상황이 발생하면 어디로 대피해야 할까? 비상계단을 이용할까? 엘리베이터를 마냥 기다리고 있을까? 아니면 에스컬레이터를 타야 하나? 정답은 올라가는 게 아닌 '옆으로' 가야 한다. 상황 발생 시 선로를 따라 미남역이나 남산정역으로 대피해야 한다. 실제로 승강장에 설치된 안내도에서는 미남이나 남산정으로 대피하는 길도 표시되어 있다.
지상으로 탈출하기 위해선, 엘리베이터와 에스컬레이터보다 남산정으로 가는 게 더 빠르다. 미남으로 가면 안된다. 만덕역에서 미남역까지는 부산 도시철도 구간 중에서도 꽤 긴 구간이다. 직선거리로 3km 정도 떨어져 있다. 급박한 상황, 깜깜한 선로를 3km나 걷는 건 훨씬 더 위험할 수 있다. 무조건 남산정으로 도망가자.
왜 이렇게 깊이 지어졌을까?
만덕역 역시 지형과 관계가 깊다. 만덕역이 있는 곳은 바로 만덕터널 초입인 만덕고개 중턱. 만덕동은 부산에서도 지대가 상당히 높은 곳에 속한다. 만덕역을 나와 근처 육교로 올라갔다, 주변 지형이 한눈에 들어왔다. 만덕터널 쪽은 계속 올라가는 모양새였고 확실히 남산정 방향이 낮아 보였다. 저 멀리 아파트 꼭대기가 맹탐정 눈 아래에 있었다.
깊이 지어진 덕분에 만덕역은 유사시 시민들의 피난 장소로 쓰일 수 있다. 비상계단을 내려가며 확인해보니 지하 2층부터 8층까지 사람들이 몸을 피할 수 있는 공간을 확인할 수 있었다. 현재 만덕역 에스컬레이터는 가동하지 않고 있다. 역무원에 따르면 "에스컬레이터만 5분 이상 타야 한다"며 "이용하는 사람들이 적고 안전상의 이유도 있어서 현재는 운행을 중단한 상태"라고 말했다.
<사건결말>
부산 도시철도 역사(驛舍)의 역사(歷史)
1985년 7월 19일 부산 도시철도 1호선이 개통한 이후, 2022년 현재 부산의 도시철도는 환승역을 제외하면 모두 104개의 역이 있다.
거기다 동해선 23개, 김해경전철 21개까지 합하면 모두 148개. 조금 부풀려 말하면, 이 말은 곧 148개의 숨겨진 이야기들이 있다는 말.
올해로 개통 37주년을 맞은 부산 도시철도. 오래된 만큼 역사도 깊고 다양한 이야기들이 많다. 조금만 관심을 기울이면 도시철도 역사의 역사도 훌륭한 관광자원이 될 수 있다.
<+사족>
역 번호의 비밀
노선도를 자세히 들여다본 시민들은 알고 있겠지만 각 철도역은 고유의 역 번호가 있다. 1호선은 101, 102, 103. 2호선은 201, 202, 203. 3호선은 301, 302, 303. 이런 식으로 각 노선과 역 번호 앞자리를 맞췄다. 101번은 신평역, 201번은 장산역, 301번은 수영역으로 각 노선의 출발 지점이다. 앞자리 숫자만 보고도 몇 호선인지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새로 생긴 역은 어떻게 번호를 정할까? 2017년 개통된 1호선 동매역부터 다대포해수욕장역까지는 몇 번일까?
다대포해수욕장역을 101번으로 해서 다 갈아엎었을까? 정답은 동매역을 100번으로 하고, 역순으로 번호를 붙였다. 099번은 장림역, 098번은 신장림역이다. 다대포해수욕장은 095번이고. 일부 1호선 역 번호 앞자리가 '0'으로 매겨졌다. 번호로 노선을 구분하기가 애매해졌지만, 어쩌랴 크게 신경 쓰지 말자. 그냥 색으로 구분하자.
남형욱 기자 thoth@busan.com , 이우영 기자 verdad@busan.com , 정수원 PD blueskyda2@busan.com , 이지민 에디터 mingmini@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