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우린 지친 마음 씻으러 간다
바뀌고 있는 목욕탕 풍경
‘때’란. ①옷이나 몸 따위에 묻은 더러운 먼지 따위의 물질. 또는 피부의 분비물과 먼지 따위가 섞이어 생긴 것. ②불순하고 속된 것. ③까닭 없이 뒤집어쓴 더러운 이름.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에 적힌 ‘때’의 뜻이다. 그러니 어느 누구라도 때 없는 사람이 있을까. 한국인의 목욕 문화 중 하나는 대중목욕탕에서 시원하게 때를 미는 것. 하지만 지금은 묵은 때를 벗겨내기 여간 어려운 때가 아니다. 코로나19 사태 2년, 바뀌고 있는 목욕탕 풍경을 들여다봤다. 대중목욕탕 1960~80년대 급격히 늘어 1970년대에는 ‘때밀이’ 등장도 아파트 공급에 쇠퇴의 길 걷다 코로나로 목욕탕 영업도 타격 입어 위생·청결서 힐링·안식 목적으로 이동
대중목욕탕 1960~80년대 급격히 늘어
1970년대에는 ‘때밀이’ 등장도
아파트 공급에 쇠퇴의 길 걷다
코로나로 목욕탕 영업도 타격 입어
위생·청결서 힐링·안식 목적으로 이동
■한국인과 목욕탕, 그리고 때밀이
어릴 적 목욕탕에 얽힌 추억 하나쯤은 누구나 가지고 있을 것이다. 특히 설날 전날 목욕탕은 앉을 자리도 없이 붐볐다. 온 가족이 목욕탕에서 박박 때를 밀고 오는 게 필수 행사였다. 목욕 후 쪼글쪼글해진 손으로 마시던 바나나우유는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었지만, 어린아이에게 이태리타올은 공포의 대상이기도 했다. 어른들은 뜨거운 욕탕도, 거친 이태리타올도 “시원~”했지만 말이다.
한국에 대중목욕탕이 생긴 계기는 콜레라였다고 한다. 1821년 콜레라가 유입된 이후 많은 사람이 사망하자 지식인들이 ‘몸을 깨끗이 씻어야 함’을 강조하기 시작했다. 1896년 5월 19일 독립신문에서는 전염병을 막는 수단으로 목욕을 말하며 ‘이틀에 한 번’을 제시했다.
1920년대 일본의 영향을 받아 대중목욕탕이 생기기 시작했지만, 일본인들의 한국인 차별 사건이 빈번히 발생했다. 박윤재 경희대 교수는 공저 에서 “때가 한민족을 치욕으로 몰아넣는다면 그 상황을 벗어나는 방법은 때를 미는 것이었다”며 “때를 민다는 것은 청결을 유지하고, 한국인의 진보를 확인하며, 나아가 차별을 극복하는 방법이었다”고 말한다.
대중목욕탕의 전국적인 증가는 1960~1980년 대 사이 도시화·산업화·새마을운동의 영향이었다. 도시 집중화로 부족한 위생시설 문제가 대두되면서부터 급속히 늘었다.
한국인 때밀이의 필수품인 ‘이태리타올’은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이태리타올은 1960년대 부산의 한 직물공장에서 만들어졌다. 이탈리아에서 수입한 비스코스 레이온 원단의 까칠한 질감 특성을 살려 때를 밀기 적합한 수건을 개발했다고 한다.
목욕객의 때를 밀어 주는 ‘때밀이’가 언제부터 있었는지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대중목욕탕이 정착한 1970년대 즈음 등장한 것으로 본다. 1993년 통계청 한국표준직업분류에서 ‘욕실종사원’이라 불렀고, 요즘에는 몸을 씻어 준다는 뜻에서 세신사로 더 많이 불린다. 때밀이뿐 아니라 스포츠 마사지와 안마 등 복합 서비스를 가르쳐 주는 학원들도 성업 중이다.
■코로나 직격탄 맞은 대중목욕탕
코로나 사태로 수많은 자영업이 피해를 입었지만 그중 목욕탕의 피해도 컸다. 목욕탕발 감염이 이어지면서 부정적 이미지가 커진 데다, 방역 강화 대책에 지속적으로 포함되면서 영업에 타격을 입은 것이다.
아파트가 널리 공급되면서 쇠퇴의 길을 걷고 있던 차에 기름을 부은 격이 됐다. 행정안전부 ‘공공데이터포털’에 따르면 2019년 말 전국 6976곳이었던 목욕탕 수는 지난해 말 6269곳으로 줄었다. 2년 사이 707곳이 폐업한 것이다.
부산지역을 보면, 지난해 말 기준 영업 중인 목욕탕 수는 768곳이다. 2019년 말 847곳에서 2020년 이후 79곳이 문을 닫았다. 목욕업계에 따르면, 목욕탕 철거 비용만 해도 수천만 원이 들기 때문에 폐업 신고도 하지 못 하고 문을 닫는 곳도 많다고 한다.
이처럼 동네 목욕탕이 하나둘 문을 닫자 ‘공공목욕탕’ 건립 요구가 나오고 있다. 주거환경이 열악한 지역을 중심으로 주민의 ‘씻을 권리’를 보장해 달라는 것이다. 지난달 부산 소막마을 주민들은 남구청 앞에 모여 공공 목욕탕 건립을 요구했다.
우암동에는 목욕탕 두 곳이 있었지만 한 곳은 폐업했고 다른 한 곳은 오후 2시까지만 운영한다. 주민들은 “목욕탕에 가려면 택시를 이용해 다른 동네로 원정 가는 방법밖에 없다”고 어려움을 호소했다.
한국전쟁 당시 피란민이 소 막사를 변형해 거주하며 형성된 소막마을은 65세 이상 고령인구가 1000여 명으로 전체 인구의 절반가량을 차지한다. 게다가 주민 중 369명은 기초생활수급자라 택시를 타고 목욕탕을 가야 하는 상황이 부담이 될 수밖에 없다.
코로나 감염이 확산돼도 대중목욕탕 영업을 중지할 수 없는 이유 중 하나는 우리 사회에는 여전히 목욕탕 말고는 씻을 곳이 없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바뀌고 있는 목욕탕의 의미와 형태
생활밀착형 에세이 시리즈 의 저자 정혜덕은 목욕탕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목욕탕은 지친 마음을 쉬게 할 뿐 아니라 적극적으로 나 자신을 ‘치료’하기에 적합했다. 목욕탕에서는 몸뿐 아니라 마음에 찌든 시커먼 때를 자연스럽게 내보낼 수가 있었다. 이미 목욕업은 쇠퇴의 길을 걷고 있는데 그때까지 동네 목욕탕이 남아 있을지 모르겠다. 유현준 건축가가 설계한 전라남도 신안군 압해읍의 압해읍종합복지관 목욕탕처럼 공공건축의 힘에 기대는 것도 방법이다.”
‘압해읍종합복지관’은 유현준 건축가가 2013년 설계한 곳으로 ‘압해도 목욕탕’으로 불린다. 이 작품은 2016년 대한민국 공공건축상 최우수상과 2017 독일 디자인 어워드를 수상했다. 1층은 식당, 2층은 목욕탕, 3층은 중증장애인생활지원센터로 이뤄져 있다. 집에 목욕탕이 없는 마을 어르신들이 목욕을 하는 것은 물론 식사도 하고 대화도 나누는 공동체 공간이다.
이제 목욕탕은 위생과 청결의 목적에서 힐링과 안식의 목적으로 이동했다. 선뜻 대중목욕탕에 가는 것이 망설여지는 요즘 ‘가족탕’이 떴다. 다른 이들과 마주치지 않고 가족끼리 혹은 홀로 비교적 안전하게 때밀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파트 욕실에는 없는 깊고 넓은 욕탕과 시원하게 때를 미는 맛이 그곳엔 있다.
온천지역의 목욕탕, 숙박시설은 물론 도심의 숙박시설도 ‘가족탕 만들기’에 적극 나서고 있다. 지역 맘카페나 동네 커뮤니티카페에는 ‘가깝게 갈 수 있는 곳 중 가족탕 어디가 좋은가요?’ ‘아이들이 물놀이하고 놀 만한 가족탕 추천해 주세요’ 같은 글이 넘친다. 인스타그램의 ‘#가족탕’ 해시태그 게시글도 3만 1000건이 넘으며 인기를 입증한다.
울산 등억온천 더뱀부호텔 관계자는 “어린아이가 있는 가족 단위로 오는 경우가 가장 많고, 자식들이 부모님을 모시고 오는 경우도 많다”며 “한 팀의 이용이 끝나면 환기와 소독을 철저히 하고 있다”고 말했다. 김동주 기자 nicedj@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