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물썰물] TV 토론과 수어
조선 정조 시대 문장가 이옥의 한문소설 <신아전(申啞傳)>에 명검 제작으로 이름을 날린 대장장이 얘기가 나온다. 이름은 없고 ‘탄재(炭齋)’라는 호만 전해지는 그는 칼을 워낙 잘 만들어 일본도를 능가한다는 평을 들었던 인물이다. 그런데 말을 듣지도 하지도 못하는 농인이었다. 다행히 고을 아전 중에 신탄재의 손짓과 몸짓을 알아차리는 이가 있어 의사소통이 이뤄졌다는 대목이 소설 속에 묘사돼 있다. 이 땅에 수화가 언제부터 사용됐는지 정확한 기록은 없으나 그나마 그 내력의 한 자락을 보여 주는 사례가 아닌가 싶다.
수화가 지역의 문화나 풍토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는 건 능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전 세계적으로 나라마다 수화가 각양각색인 것도 그런 까닭일 것이다. 지금은 ‘수화 언어’의 줄임말인 ‘수어’라는 말을 쓴다. 수어는 단순한 몸짓이 아니다. 손과 손가락의 모양·방향·위치·움직임 등에 따라 의미가 다르고, 같은 동작이라도 입 모양이나 얼굴 표정에 따라 그 뜻이 미묘하게 변한다.
한국수어가 고유한 특성을 인정받은 건 2016년이다. 한국수화언어법이 제정돼 한국어와 동등한 공용어로서, 또 하나의 국어라는 지위를 얻었다. 한국수어는 한국어와 문법 체계가 완전히 다르다. 한국어 단어를 수어 단어로 손쉽게 바꾼다고 통하는 게 아니라는 뜻이다. 지난해부터는 공식적으로 ‘한국수어의 날’도 생겼다. 지난주 대선 후보들의 첫 TV 토론 중계가 시작된 3일이 바로 두 번째 맞는 법정기념일이었다.
수어의 날이 무색하게도 이날 TV 토론은 통역에 대한 배려가 아쉬웠다는 지적이 많았다. 수어 통역사가 화면 구석에 너무 작게 나와 내용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고 대선 후보들과 사회자가 동시에 말을 주고받는 상황을 한 사람의 수어 통역사가 감당하기엔 역부족이었다는 것이다. 통역사의 화면 비율 확대나 후보 수에 맞는 통역사 추가 배치는 향후 방송사나 영상 매체들이 적극적으로 고려해야 할 부분이다.
안타까운 건 장애인 문제에 대한 대선 후보들의 미지근한 반응이다. 한두 가지 주요 이슈 이외에는 이렇다 할 관심이 없는 듯하다. 우리 사회 곳곳에는 장애인뿐만 아니라 힘겨운 삶을 버티고 선 소수자들이 적지 않다. 이들을 위한 기본권 보장과 권리 확대에도 동등한 마음 씀씀이를 보여 줄 순 없는 걸까. 그 진정성이 대선 공약의 비중 있는 의제로 이어지길 기대한다.
김건수 논설위원 kswoo3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