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국에서] 우리나라는 선진국인가

부산닷컴 기사퍼가기

김희돈 편집부장

설 연휴에 몇 편의 영화를 봤다. 시시각각 지구를 향해 돌진하는 거대 혜성으로 재앙을 맞을 상황에서도 오직 속물근성에만 충실한 이들을 신랄하게 비튼 ‘돈 룩 업’. 2시간이 넘는 러닝타임이 전혀 지겹지 않게 느껴질 연출력을 선보인 애덤 매케이 감독의 실력에 다시 한번 감탄하게 된 수작이다. 비밀스러운 권력자 딕 체니의 실화를 담아낸 ‘바이스’로 정치 블랙코미디 장르 연출력을 인정받은 매케이의 작품다웠다고나 할까. 메릴 스트리프, 리어나도 디캐프리오, 제니퍼 로런스, 티모테 샬라메를 한 작품에서 보는 것도 시네필로서는 행복한 경험이었다.

새삼스러울 것도 없지만 할리우드 영화에서 만난 한국의 모습도 인상적이었다. 2000년대 초반만 해도 함께 지구를 수호할 믿음직한 동맹국으로 일본을 언급했을 상황에서 한국이 거론되거나, 도쿄 시부야 횡단보도의 대형 스크린 속 뉴스 속보가 등장할 장면에 서울역 대합실 TV가 나오는 식이다.

최근 개봉한 할리우드 영화
변화된 한국 위상 실감케 해
국제기구 통계로도 뒷받침

그래도 여전히 남는 궁금증
우리 국민은 정말 행복한가
대선 후보들 당당히 답해야


이런 변화상은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에서도 만날 수 있었다. 고속도로 전투 신에서 MIT 입학처장이 타고 있던 현대 투싼은 닥터 옥토퍼스의 가공할 만한 공격에도 끝내 파괴되지 않고 승객을 지켜낸다. 전직 CIA 요원의 정체성 찾기 과정을 스릴 있게 그린 ‘본 시리즈’ 중 2004년 개봉한 ‘본 슈프리머시’에서 고작 암살자의 추격 장면에 노출된 쏘나타를 보고 열광했던 기억을 되새기면 격세지감이 아닐 수 없다. 덩치 커진 글로벌기업 현대의 마케팅 파워가 작용한 결과지만, ‘라라랜드’에서 라이언 고슬링과 호흡 맞춘 에마 스톤이 토요타 프리우스를 타던 장면을 부러운 마음으로 지켜봤던 나로서는 괜한 ‘차부심’까지 느낄 정도였다.

그렇다면 스크린을 벗어나 바라보는 한국은 어떤 모습일까. 할리우드를 종횡무진 질주하는 국산 자동차의 위상을 지구 공동체에서의 코리아 위상과 동일시해도 괜찮을까.

지난해 7월 유엔무역개발회의(UNCTAD)는 한국의 지위를 아시아·아프리카 개발도상국 집단인 A그룹에서 선진국 집단인 B그룹으로 변경했다. 1964년 기구가 창설된 이후 57년 만의 첫 사례라고 한다. 각종 지표로도 우리나라는 이미 선진국 지위를 인정받고 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엔 일본과 함께 아시아에서 ‘유이’하게 가입돼 있다. 지난해 기준 국제통화기금의 국내총생산(GDP) 순위에서 한국은 세계 10위에 이름을 올렸다. 1인당 GDP로는 앞서 2020년 주요 7개국(G7) 국가인 이탈리아를 추월하기도 했다. 1인당 국민총소득(GNI)도 3만 달러를 넘어서며 세계 7번째로 3050클럽에 가입했다. 3050클럽은 인구가 5000만 명 이상이면서 1인당 국민총소득이 3만 달러를 넘는 나라를 일컫는 용어로 선진국과 강대국을 동시에 칭할 때 쓰인다. 한국은 2020년에 이어 지난해까지 G7 정상회의에 2년 연속 초청받기도 했다. 국제사회에서 한국의 위상이 올라가고 있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수치상으로 드러나는 근거가 이렇게 많은데도 여전히 우리나라가 선진국이 되려면 아직 갈 길이 멀다는 얘기가 많이 들린다. 요즘 인터넷에서도 ‘우리나라는 선진국인가’를 두고 논박이 오가기도 하는데, 반대 의견을 올리면 “국수주의도 문제지만 지나친 자기비하도 바뀌어야 할 병폐”라는 반박 글이 꼬리를 문다.

그런데도 생각할 면이 적지 않은 게 현실이다. 특히나 규모의 경제를 평가한 결과물만으로 우리나라가 선진국 궤도에 올라섰다고 자부할 수 있느냐는 질문 앞에 서면 더더욱 그렇다. 반대의 상황을 가리키는 지표 역시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가령 2020년 기준 연간 한국인의 노동 시간은 1908시간으로, OECD 국가 중 유일하게 2000시간을 넘는 멕시코 다음으로 길다. 세계보건기구가 밝힌 인구 10만 명당 자살자 수는 25.7명으로 세계 4위에 랭크돼 있다. 합계출산율은 0.84명으로 세계 유일 0명대를 기록하고, 산재 사망률은 OECD 국가 최상위권을 오르내리고 있다. 이런 이유 때문인지 유엔이 발표한 세계행복지수(2018~2020)에서 우리나라는 10점 만점에 5.8점으로 62위에 머물러 있다. OECD 국가로 범위를 좁히면 뒤에서 세 번째에 해당한다.

대선의 해 벽두에 발생한 광주 건설현장 붕괴 사고는 성장 일변도의 사회가 놓치고 있는 것들을 한꺼번에 보여 주는 상징적 사건이다. 국민을 집단 우울과 불행으로 내모는 이런 비극이 사라졌을 때에야 비로소 선진국 국민이라는 자부심을 느껴도 늦지 않을 것이다. 30일 뒤면 20대 대통령 선거가 열린다. 자신만이 준비된 후보라며 지지를 호소하는 이들에게 묻고 싶다. 우리나라는 선진국인가? 이 질문에 머뭇거려진다면 다시 묻겠다. 국민을 행복하게 할 공약을 가지고 있는가? 당당히 밝혀 주시기 바란다. happyi@busan.com


당신을 위한 AI 추천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