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설위원의 시선] 보수동 책방골목 ‘소멸’, 보고만 있을 건가

김건수 논설위원 kswoo333@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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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정체성 품은 공공의 미래유산, 적극적 보존 방안 찾아야

전국 어디서도 볼 수 없는 보수동 책방골목은 한국 근현대사가 농축된 문화유산이다. 부산의 다른 미래유산에도 영향을 미치는 만큼 부산시와 관할 지자체가 적극적인 의지를 갖고 보존 방안을 찾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부산일보DB 전국 어디서도 볼 수 없는 보수동 책방골목은 한국 근현대사가 농축된 문화유산이다. 부산의 다른 미래유산에도 영향을 미치는 만큼 부산시와 관할 지자체가 적극적인 의지를 갖고 보존 방안을 찾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부산일보DB

부산을 상징하는 또 하나의 공간이 사라질 위기에 처했다는 소식이 파다하다. 보수동 책방골목 자체가 존폐의 갈림길에 놓여 있다는 뉴스다.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고 미래유산의 가치를 지닌 책방골목은 전국 어디서도 볼 수 없는 부산만의 특별한 공간이다. 그 소멸을 지켜만 볼 것인가.


한국전쟁 때 형성된 지역 명소

인터넷 시대 오자 ‘침체의 길’


70여 년 한국 근현대사 담은

문화유산이자 ‘아날로그 보고’


부산시, 미래유산 지정 불구

보존·관리 행정적 지원 전무

지구단위계획 지정 등 절실


사유지 사들이는 방식 통해

원형 보존·난개발 최소화 필요

다른 문화유산 보존 모범 돼야


■거듭된 쇠락… 존폐 갈림길

설 연휴가 끝난 지난 주말, 보수동 책방골목에는 쓸쓸한 냉기가 흘렀다. 수은주가 영하로 떨어진 날씨 탓이겠으나 골목 전체가 전에 없이 왜소해진 느낌이 완연하다. 동행자들은 “휑하다” “을씨년스럽다”는 표현까지 썼다. 골목 입구 서점 8곳이 밀집했던 자리는 새로 들어설 오피스텔의 공사장 펜스가 막아선 지 오래다. 가림막 너머로 비탈에 쌓인 토사 더미와 버려진 쓰레기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다. 마치 책방골목의 고된 운명을 웅변하는 듯 황량한 풍경에 마음이 무거워진다.

보수동 1가 대청사거리에서 보수사거리를 조금 지나는 200여 m가량의 좁은 골목길. 이를 사이에 두고 빼곡한 서점들이 마주하는 공간이 책방골목이다. 한국전쟁 때 피란민들이 책을 내다 팔면서 형성된 뒤로 70여 년을 이어 온 부산의 명소다. 1970~80년대 70개가 넘는 서점이 번성했으나 인터넷 시대의 도래와 대형서점의 등장으로 침체의 길을 걸었다. 임대료는 치솟는데 책은 안 보고 인증샷만 찍고 가는 서글픈 풍조가 쇠락을 거들었다. 최근 1~2년 새 폐업과 매각으로 문을 닫는 서점이 급증해 남은 책방은 이제 서른 곳 정도. 이 일대 땅과 건물들이 다 사유재산이다 보니 나머지 서점들도 그 앞날을 내다보기 힘들게 됐다.


■한국 근현대사 농축된 보수동

그러나 보수동 책방골목은 단순한 서점 밀집 공간이 아니다. “보수동 책방골목을 가지 않고 부산을 보았다 하지 말라.” 이런 말이 전혀 어색하지 않은 때가 있었다. 보수동과 책방골목의 역사성과 장소성의 가치를 말하는 것이다.

조선 시대 변방의 국경도시에 불과했던 부산이 큰 도시로 성장한 계기는 개항과 한국전쟁이다. ‘임시수도 부산 1000일’이라고 일컫는, 정치적 격동과 사회·경제적 혼란이 점철된 시기가 결정적이었다. 그때, 절망과 허무 속에서 슬픔과 고통을 쓰다듬어 바닥을 치고 일어서는 한국 역사의 새로운 출발점을 만든 곳이 부산이다. 그 국란의 현장에서 임시수도 청사가 있었던 공간이 보수동이다. 보수동은 일제강점기부터 이어진 정치 1번지였다.

1950년대 피란민들은 생계를 위해 헌책을 내다 팔았다. 노점이 하나둘 늘고 가게가 모이면서 자연스럽게 보수동에 책방골목이 형성됐고, 전국에서 사람들이 책을 좇아 운집했다. 그것은 실로 세대를 뛰어넘는 풍경이었다. 시민들은 헌책을 사고팔면서 천장까지 첩첩이 쌓인 책들만큼이나 다양한 기억과 숱한 이야기들을 빚고 품었다. 낡은 책 속 손때 묻은 흔적과 메모, 낙서, 추억, 이 모두가 ‘아날로그의 보고’다. 책방골목이 물리적 장소를 넘어 정신적 문화유산이 되는 이유다.

2000년 이후에는 원도심 재생과 더불어 카페와 사진관도 밀집해 문화중심지 역할을 수행해 왔다. 70년이면 참으로 끈질긴 생명력이다. 역사적, 장소적 가치 측면에서뿐만 아니라 디지털 시대에 사라지는 ‘서적 문화’의 보루로서 지켜져야 하는 것이 보수동 책방골목이다.


■공공의 미래유산, 보존 방법 없나

현재 보수동 책방골목은 부산시 미래유산으로 지정된 상태다. 시가 그 보존 가치를 인정했다는 뜻이다. 하지만 거기에 멈춰 서 있다. 미래유산 지정의 근거가 되는 조례가 있으나 보존·관리를 위한 행정적, 재정적 지원 내용이 없어 선언 수준에 그친다. 현실적 대안을 마련해 서둘러 조례를 개정하는 건 부산시의 기본 역할이다.

무엇보다 시급한 것 중 하나가 지구단위계획 지정이다. 특정 구역의 토지이용·건축 계획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경관을 만들고 관리하는 것을 뜻한다. 도시재생 등 공공사업이 추진되는 원도심을 중심으로 개발보다는 정비와 관리·보존 차원에서 사회적 규칙을 마련하는 추세다. 인천 원도심(2003)과 전주한옥마을(2003), 부산의 감천문화마을(2017)이 대표적이다. 감천문화마을의 경우 부산시가 독특한 도시공간과 경관을 건축문화유산으로 보존하기 위해 지구단위계획을 도입해 건축물 형태라든지 높이·용도 등 기준 설정을 위한 근거를 마련한 바 있다.

최근 사례로는 아미동 비석마을을 눈여겨 살펴볼 만하다. 6·25전쟁 당시 피란민들이 일본인 공동묘지 위에 판잣집을 지어 살았던 곳인데, 올해 초 부산시가 비석마을의 일부 주거지를 처음으로 시 등록문화재로 지정했다. 비석마을 일원은 향후 역사문화유산 보존을 위한 지구단위계획이 적용된다.

공간 일부가 문화재로 지정되면 문화재보호법에 따른 역사문화환경 보호 제도도 활용할 수도 있다. 문화재를 둘러싼 일대를 지자체가 역사·문화적 보존 지역으로 지정해 건축행위를 제한하는 행정 계획이 가능하다. 아직은 지정문화재에 한정돼 있는데 등록문화재로 확대 적용하는 내용의 법률 개정이 먼저 이뤄져야 한다. 등록문화재는 지정문화재가 아닌 것 가운데 50년 이상 된 근대 문화·생활 유산을 대상으로 한다. 70년 역사의 보수동 책방골목은 이를 충분히 충족한다. 부산시와 관할 지자체가 적극적인 의지를 갖고 문화재 지정 권한을 확장해 나갈 필요가 있다.


■다른 문화유산 보존의 바로미터

안타깝게도 보수동 골목책방은 그 원형이 많이 훼손된 상태다. 부산시가 일찌감치 치밀한 준비에 나섰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크다. 사유지를 사들이는 방식 등을 통해서라도 원형 보존에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 골목 중앙에 건립된 문화관은 그 존재 이유가 의문스럽다. ‘되레 책방 공간만 차지한다’ ‘차라리 서점에 임대하는 게 낫지 않냐’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어쨌든 지금이라도 이 일대의 난개발 움직임을 최소화하고 보전 가능성을 높일 방안을 계속 찾아야 할 것이다.

보수동 책방골목의 보존 문제는 향후 부산의 정체성을 품은 또 다른 공간에 적용될 바로미터일 수 있다는 점에서도 매우 중요하다. 부산에는 피란수도 상징 거리인 대청로 주변을 비롯해 미래유산으로 지정된 산복도로와 자갈치시장, 국제시장, 초량 상해거리, 영도 선착장 등이 있다. 앞으로 재산권과 도시 공동체의 공공성이 충돌하는 현장에서 부산다움의 공간을 어떻게 지켜 나가느냐는 선례로서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부산의 풍경은 부산 시민이 만드는 것이다. 부산의 역사성과 장소성을 지닌 공적 공간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시대에 걸맞은 새로운 옷을 입고, 오래 기억되면서도, 지금 여기서 함께 살아 숨 쉬는 곳. 책방골목에 희망 깃든 봄이 어서 찾아오길 바란다.


김건수 논설위원 kswoo333@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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