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광식의 인문예술 풀꽃향기] 겨울 강
전 고신대 총장
강산도 우리네들처럼 계절을 탄다. 산은 한곳에 뿌리내리고 우뚝 솟아 있지만 사시사철 옷을 갈아입고, 강도 그저 흘러가는 게 아니라 계절마다 변신한다. 봄 강은 강변 얼음들이 녹으면서 맑은 물이 힘 있게 흐르고 생명의 기운이 충만하다. 특히 얼어붙었던 강이 풀리면서 뱃길을 만든다. 여름 강은 작렬하는 햇볕을 피해 몰려든 군상들의 벌거벗은 도피처가 된다. 그러다 보니 강물은 탁해지고 신음한다. 가을 강은 떨어진 낙엽들과 함께 여름이 남긴 얼룩들을 다 보듬고 흘러간다. 그런 가운데 수량마저 줄어 초라할 뿐만 아니라 쓸쓸하기까지 하다. 그리고 겨울 강은 생명의 모든 날갯짓이 중단된 양 죽은 듯 고요하다. 그것은 깊은 침묵 속에 흐른다.
이렇다 보니 강은 계절에 따라 색상과 이미지가 달라진다. 봄 강은 새싹에서 보이는 녹색과 생명 이미지, 여름 강은 모래밭 열기가 풍기는 붉은색과 욕망 이미지, 가을 강은 낙엽의 갈색과 우수(憂愁) 이미지, 겨울 강은 수면과 죽음에서 암시되는 검은색과 침묵 이미지이다. 원로 시인 박이도 선생은 가을 강을 ‘울고 있는 강, 울고 싶은 강, 참회의 강’이라고 읊조렸는데 이에 비해 겨울 강은 잠들어 있는 강, 잠들고 싶은 강, 죽음의 강이라고 할 만하다.
바람과 눈, 푸른 달빛마저 품는 강물
자연의 교향악이자 한 폭의 수묵화
언어로 형용할 수 없는 그윽한 서정시
당나라 시대를 넘어 중국 문학사에서 딱 두 명만 꼽으라 해도 들어갈 이백과 두보는 모두 산수지간에 노니는 것을 좋아했다. 이백의 작품에서는 산이나 달에 관한 시가 인상적인 반면 두보의 글에서는 강이나 물에 대한 시가 자주 등장한다. ‘산중문답’에서 이백은 ‘벽산’ 즉 푸른 산을 읊었고, 연못가에 초당을 짓고 평생 장강을 오르내리던 두보는 ‘범강(泛江)’ 즉 ‘강에 배 띄우기’를 노래한다. 두보의 작품들에서는 계절에 따른 강의 모습이 흔하게 그려지고 있다. 유명한 ‘곡강’에서는 수많은 꽃잎이 낙화하는 봄날의 강을, ‘춘야희우’에선 배들이 유유자적 떠 있는 봄밤의 강을 노래한다. 그리고 ‘강촌’에서는 맑은 강이 마을을 안고 흐르니 운치가 그윽하다고 여름 강을 묘사한다. 또한 ‘등고’에서는 강가 모래밭으로 새들이 날아오고 낙엽은 끝없이 소소하게 내리고 있다고 가을 강을 표현한다. 가을 강을 노래한 시로는 당나라 문인 장계의 ‘풍고야박’도 유명하다. 달 지고 까마귀 울며 하늘엔 서리가 가득한데 단풍나무 사이로 고깃배의 불빛이 수심으로 잠 못 이루는 나그네의 뱃전까지 비친다고 읊조린다.
이런 중당(中唐) 시인들의 대스승 격인 장약허는 ‘춘강화월야’라는 시에서 ‘강물이 봄을 흘려보내 이 봄도 지나가려 한다’고 읊고 있는 바, 이렇듯 강은 봄 여름 가을을 다 흘려보내고 이제 겨울을 맞이하게 되었다. 겨울 산은 찾는 이들이 있어 그다지 적막하지 않지만, 겨울 강은 그야말로 적막하다. 넓고 반반한 하류에는 얼음 썰매를 타거나 낚시하는 이들이 있을지 몰라도 계곡 사이로 흐르는 산골의 강은 쓸쓸하기 그지없다. 당나라 문장가 유종원도 ‘강설’에서 ‘외로운 배엔 도롱이에 삿갓 쓴 노인/ 홀로 낚시질하는데 차가운 강엔 눈이 내린다’라고 하는데, 두 시구의 첫 자를 따면 ‘고독(孤獨)’이 되듯이 자신의 처지뿐 아니라 겨울 강의 고독을 읊조리고 있다.
겨울 강에는 물속을 휘젓고 돌아다니던 물고기들도 긴 잠에 빠지고 게다가 늦가을까지 강 위에서 노닐던 풀벌레마저 찾지 않는다. 이 적막한 강에는 눈 내리는 날도 있지만 대개 낮에는 차가운 강바람이 휩쓸고 밤에는 푸른 달빛만 휘영청 비친다. 하지만 강은 흰 눈이 뒤덮을 기세로 쏟아져 내려도 다 자기 안으로 품어 녹이면서 그 위세를 무력화시킨다. 또한 살을 에는 바람이 강물을 얼려 꼼짝 못 하게 하지만 강은 그것을 역이용해 얼음 방어막을 치고는 그 아래로 유유히 흐른다. 그리고 장약허는 ‘어느 봄날 어느 강에 이런 달빛이 없으랴 마는!’이라고 읊조렸으나, 실로 어느 겨울철 어느 겨울 강에 이런 달빛이 없으랴? 달빛은 겨울 강에 제 얼굴을 비춰 보지만 강물은 출렁대며 짓궂게 흩트려 놓는다.
어디 그뿐이랴. 사계절 중 가장 맑고 명랑하게 흐르는 겨울 강물은 얼음에 스치고 돌에 부딪히며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노래를 연주한다. 겨울 강은 인간의 소리나 기계음이 아닌 자연의 순수 음악이 연주되는 장엄한 오케스트라 공연장이다. 또한 겨울 강은 끝없이 이어지는 거대한 미술 작품이다. 다른 계절의 강 풍경이 유채화와 방불하다면 겨울 강은 마치 수묵화 같다. 얼음과 눈과 돌은 흰색을, 물과 나무와 바위는 검은색을 연출한다. 아니, 겨울 강은 음악가나 화가가 아니라 어쩌면 시인이리라. 그 그윽한 정취는 인간의 언어로는 필설하기 어려운 자연의 서정시다! 나 홀로 좋아서 흐르는데 구경꾼이 없으면 어떠랴? 이렇게 겨울 강은 우리의 망각 가운데 저기 흐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