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을 여는 시] 무정부의 나날 - 존재론을 떠나며
박춘석(1963~)
당분간 무정부주의자로 살기로 했다 나라를 건설하는 일이 획일화되어…… 제비꽃이었지만 제비꽃을 고집하지 않기로 했다 잠시 지붕이 없는 집에서 살았다 집시까지는 가지 않았다 지붕이 있는 네모난 집에 들어가서는 물이 되었다 뼈대를 포기했고 계절에서 조금씩 떨어져 있었다 전화를 늦게 받거나 경주에서 뒤처진 듯 늦게 여름에 도착했다
약속도 목련의 세계 겹벚꽃의 세계로 들어가야 했으므로 취소했다 바람을 자유의 상징으로 사람들은 말하지만 중력을 잃어 그다지 자유롭지 않았다 어느 날은 나라를 떠났고 어느 날은 나라를 찾아갔다 바다를 가는 날이라던가 영화를 보는 날이라던가…… 그러나 마지막에는 멀리 서 있는 나를 손짓하여 부르고 나란히 그림자를 떨어뜨리며 정부 청사 쪽을 향해 걸었다
(중략)
손에 벽돌을 들지 않는 동안 하얀 백지와 같은 해가 떴다 지고 해를 건너는 걸음은 불안했고 손이 떨렸다 행복도 없고 불행도 없었다 행복을 닮은 시간과 불행을 닮은 시간을 교차하며 정부의 날이라 부르고 무정부의 날이라 불렀다
-시집 (2021) 중에서
“모든 것은 공허하다. 모든 것은 동일하다. 모든 것은 이미 있었던 것이다.” 니체의 차라투스트라에 나오는 예언자가 하는 말이다. 시인과 정치인은 모두 예언자이다. 시인이 말하는 꿈과 정치인이 말하는 미래는 일반인들에게 모두 공허한 메아리로 들리지만 언제나 동경의 대상이 된다. 백 년 전의 예언과 지금의 예언이 언제나 동일하지만 일반인들은 새로운 예언이라고 속는다. 차라투스트라는 또 말하길 정신의 속죄자는 시인들로부터 성장한다고 했다. 무정부의 나날이야말로 시인이 꿈꾸는 진짜 세상이지만 이 또한 수백 년 전부터 꿈꾸어 왔던 예언이다. 시인의 말처럼 감옥과 시베리아는 다른 모습의 같은 곳이다. 이규열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