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북 단상] 이름들
최혜규 사회부 차장
텔레그램 ‘N번방’ 사건을 처음 공론화한 ‘추적단 불꽃’의 박지현 씨가 여당 대선 선대위에 합류하면서 한 인터뷰에서 눈길이 멈춘 대목이 있었다. 익명 활동만으로도 신변의 위협을 받았던 그는 처음으로 이름을 밝히고 정치에 뛰어들면서 자신이 모니터링하는 텔레그램 방에 자신의 얼굴과 이름이 올라올 것을 감수했다고 했다. 그를 움직인 고민은 ‘피해자들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자리’였다.
사진 속 그의 눈빛을 보고 또 하나의 이름이 떠올랐다. 2018년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의 성폭력을 고발한 김지은 씨다. 그는 책 ‘김지은입니다’에서 당시 방송 인터뷰에 직접 출연해 이름과 얼굴을 공개한 건 그렇게 하지 않으면 권력이 진실을 묻고 자신도 같이 묻혀버릴 것 같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고 썼다. 두 번째 이유는 또 다른 피해자를 막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젠더폭력 피해자를 드러낸다는 것은 여전히 많은 이에게 2차 피해를 감수하고 이름과 얼굴로 표상되는 자신의 존재를 걸어야 하는 일이다. 그럼에도 그 길을 선택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김지은 씨와 같은 이야기를 한다. 수많은 피해자들의 곁에 서겠다는 연대다. 젠더폭력으로 잃은 자식을 위해 목소리를 내기로 한 유가족들도 마찬가지다.
그런 이름들 중에 이예람 중사와 황예진 씨가 있었다. 지난해 한 명은 공군 내에서 성추행과 2차 가해 피해를 호소하다 스스로 세상을 떠났고, 한 명은 남자친구에게 폭행당한 뒤 숨졌다. ‘브로콜리 너마저’의 노래를 좋아한 스물 셋 여군, 이제 막 취업과 이사를 한 스물 여섯 사회초년생은 영정 사진 속에서 영영 나이 들지 않는다.
유가족들은 철저한 수사와 가해자 처벌을 요구하며 딸의 이름과 얼굴을 세상에 공개했다. 그러나 이 중사의 신고를 축소하고 은폐한 정황에도 군의 초동 수사 책임자와 수뇌부는 단 한 명도 기소되지 않았다. 혐의 입증을 위해 딸의 참혹한 모습이 담긴 폭행 CCTV 영상을 보고 또 봐야 했던 황 씨의 어머니는 구형에 못미친 선고 이후 “이럴 줄 알았다면 아이의 실명과 얼굴도 공개하지 않았다”며 울먹였다.
“예람이와 같은 여군”, “또 다른 예진이”가 생기지 않는 것이 오직 유가족의 바람이었다. 앞선 수많은 피해자들의 이야기가 충분히 기억되지 못하고 잊혀졌기 때문에 이예람 중사와 황예진 씨의 비극이 있었다면, 계속되는 피해의 고리를 끊기 위해 그들의 이름을 잊지 않고 법과 제도의 변화를 이끌어내는 것은 온 사회의 과제여야 한다.
국방부에 따르면 지난해 군에서 일어난 여군 대상 성폭력 사건은 771건, 월 평균 64건 꼴이다. 경찰청 통계만 봐도 최근 5년간 연인을 대상으로 한 살인이나 살인미수 혐의로 227명, 폭행·감금·협박 등으로 4만 7528명이 검거됐다. 그런데도 데이트폭력이 젠더 문제와 무관한 범죄고, ‘여자라서 죽었다’가 추상적인 구호라는 제1야당 대표의 말은 정치인으로서 무책임하고 또 유해하다.
대선 공식 선거운동이 시작됐다. 모든 후보가 국민과 새로운 미래를 말하지만 ’여성가족부 존폐‘ 이슈에 묻혀 젠더폭력은 좀처럼 진지하고 중요한 의제로 오르지 못하고 있다. 그들의 국민과 미래에 여성의 자리가 있다면 젠더폭력 문제는 보다 충분히 이야기되어야 마땅하다. iwil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