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물썰물] 동네 공중목욕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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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이전 우리나라에선 여럿이 알몸으로 함께 탕에 들어가 목욕하는 일은 상상하기 어려웠다. 강에서 몰래 멱을 감거나 커다란 나무통에 물을 받아 몸을 담그는 정도였다. 그런데 구한말 신문물을 접하면서 위생이라는 개념이 대두했다. 당시 개화파들은 위생을 근대로 나아가는 상징으로 여겼다. 1888년 박영효는 “인민들에게 목욕할 수 있는 곳을 만들어 더러운 것과 전염병을 면하도록 깨우쳐야 한다”며 고종에게 공중목욕탕 설치를 요청했다. 실제로 1895년 갑오개혁 이후 조선 정부는 공중목욕탕 지원 정책을 추진했다.

하지만 이는 제도화로 이어지지 못했고, 1876년 개항 이후 설치된 일본인 거주지에서 먼저 공중목욕탕이 모습을 드러냈다. 일본인 전용으로, 부산에서는 목욕탕 급수를 위해 1894년 이후 세 차례에 걸쳐 상수도 시설까지 마련됐다. 일제강점기에 들어선 뒤 조선총독부는 목욕탕영업단속규칙을 제정해 전국에 시행했는데, 이후 공중목욕탕은 보편화하기 시작했다. 그 시작을 평양(1924년) 또는 서울(1925년)에서 찾는 이도 있으나 아무래도 부산이 가장 유력해 보인다.

그도 그럴 것이 부산에는 동래온천이 있었다. 그 명성이 하도 대단해 일본인들도 동래온천에서 목욕 한 번 하는 게 소원이었다고 한다. 그 소원은 1922년 만주철도주식회사가 동래온천에 대규모 공중목욕탕을 개장하는 데로 이어졌다. 이후 일본 민간 자본과 조선인 자본의 공중목욕탕도 잇따라 문을 열어 경쟁함으로써 당시 동래온천의 공중목욕탕은 호황을 누렸다. 1930년 한 해에만 10만 4253명이 이용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당시 부산 인구는 13만 명이 채 못 됐다.

여하튼 그런 과정을 거쳐 공중목욕탕은 동네에 으레 하나쯤은 있는 친숙한 공간으로 자리 잡았다. 뜨끈한 물에 몸을 담근 채 이웃끼리 이야기를 나누는 동네 사랑방 역할을 했다. 때 미는 사람, 이발하는 사람, 신발 닦는 사람들로 북적였고, 카운터에 앉은 미모의 여주인을 보러 실없이 매일 목욕탕을 찾는 사나이도 있었다.

그랬던 공중목욕탕이 언젠가부터 조금씩 사라지더니 코로나19 사태 이후 급감했다. 2019년 전국 6976곳에서 지난해 말에는 6269곳만 남았다고 한다. 폐업 신고 없이 문 닫은 곳도 많다고 하니 실상은 더 처참할 터이다. 세월의 흐름을 어찌 막겠냐마는, 주민 복지시설로 활용하자는 등 공중목욕탕 활성화 방안이 여럿 거론된다고 하니 그나마 다행이다. 어떤 형태로든 좋은 결과를 내기를 바란다. 임광명 논설위원 kmy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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