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명섭의 플러그인] 퇴임 대통령의 귀향이 성공하려면
논설위원
거리 곳곳에 제20대 대통령 후보들의 플래카드가 펄럭인다. 선거 운동 중반으로 접어들면서 후보들의 유세 경쟁도 열기를 더하고 있다. 싫거나 좋거나 간에 내달 9일이면 새 대통령이 결정된다. 그때부터 그는 국내외의 스포트라이트를 한 몸에 받는 ‘귀하신 몸’이 된다. 새 대통령의 선출은 조만간 퇴임 대통령이 한 명 더 늘어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현행 헌법 체제 이후 지금까지 퇴임 대통령은 모두 6명인데, 오는 5월엔 문재인 대통령도 곧 이 대열에 들어선다. 안팎의 축하 속에 취임하는 새 대통령과 달리 물러나는 대통령은 대체로 차분하게 새로 살 곳으로 떠난다. 퇴임 대통령에 대해 보통 대중이 많은 관심을 보이는 것은 퇴임 이후 살 지역과 ‘사저’로 불리는 집이다. 둘 중에선 집이 더 관심거리였다. 여태껏 서울에만 국한된 거주지보다는 살 집이 더 이목을 끌 수밖에 없었다.
오는 5월 9일 문 대통령 퇴임 귀향
박 전 대통령도 최근 대구 정착 결정
수도권 일극주의 속 시사점 매우 커
우리 사회·국민에 좋은 본보기 기대
권위 탈피 지역사회에 녹아 들어야
사생활 존중하는 시민의식도 필수
이런 대중의 생각에 균열을 낸 계기가 2008년 노무현 전 대통령의 봉하마을 귀향이다. 그때까지 우리나라에선 한 번도 본 적 없었던 퇴임 대통령의 귀향은 국민에게 신선한 경험이었다. 개인의 정치적 성향과는 별개로 퇴임 대통령의 ‘탈(脫)서울’은 특히 수도권 일극주의에 질린 지방으로선 더욱 특별하게 다가왔다.
물론 퇴임 대통령 한두 명이 지방에 산다고 해서 현재의 공고한 수도권 일극주의가 당장 어떻게 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서울을 떠나 고향이나 평소 살고 싶었던 지방에서 소소한 일상으로 여생을 보낸다면 지금의 우리 사회 현실에 비춰볼 때 시사하는 바는 매우 클 것이다.
그런 점에서 문 대통령이 퇴임 뒤 경남 양산으로 다시 돌아오고, 박근혜 전 대통령도 최근 고향인 대구로 귀향을 선택한 것은 매우 주목할 만하다. 현직 대통령과 같은 서울 하늘 아래에 머물지 않고, 지방에서 지역사회 봉사나 연구 활동 등 새로운 영역을 확보한다면 본인은 말할 것도 없고 우리 사회와 국민에게도 좋은 본보기가 될 수 있다.
퇴임 대통령이 단지 육체인 몸만 지방에 있는 게 아니라 예전의 권위를 버리고 주민들과 어울리면서 지역사회에 녹아 든다면 현직 때의 정치적인 공과와는 별개로 새로운 이미지를 획득할 수 있다. 가장 좋은 사례가 미국의 제39대 대통령이었던 지미 카터다. 현직 때의 권위는 내던져 버리고 시골 고향에서 헌신적인 봉사 활동으로 전 세계에 퇴임 대통령의 새로운 전범을 만들었다.
우리나라 역대 대부분의 대통령이 퇴임 뒤 서울을 벗어나려 하지 않은 것도 아마 현직 때의 권위를 떨쳐 버리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다. 일국의 대통령까지 지냈는데, 어떻게 수도인 서울과 현격한 생활 차이가 나는 지방에서 살 수 있느냐고 여길 수 있다. 또 서울에 있으면 수시로 재임 중 자신이 임명했던 고위 공직자나 정치인의 인사를 받는 등 폼 나는 전직의 예우를 누릴 수 있는데, 무엇 때문에 지방에서 외로운 노년을 자초할 것이냐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제는 예전의 권위로 자신을 증명하고 표현하는 시대가 아니다. 빠르게 탈권위주의로 변하고 있는 사회적 흐름을 누구라도 비켜 갈 수 없는 때가 요즘이다. 문 대통령과 박 전 대통령의 지방 귀향이 이런 흐름을 앞당기는 마중물이 됐으면 좋겠다.
퇴임 대통령의 성공적인 귀향을 위해서는 주변의 노력도 꼭 더해져야 한다. 주민들과 어울려 소소한 일상을 누릴 수 있도록 퇴임 대통령을 ‘보통의 개인’으로 대하는 태도가 필요하다. 선거 때나 자신이 궁지에 몰렸을 때 어떤 정치적 목적으로 퇴임 대통령을 찾아가거나, 당파의 존재감이나 세 과시를 위해 떼로 몰려가 언론 매체에 알려지기를 바라는 일은 지양해야 한다. 개인적인 방문이야 할 수 있겠으나, 최대한 조용히 진행하는 게 좋을 듯하다.
보통 사람의 퇴임 대통령을 보는 일은 결국 성숙한 시민의식이 필수적임을 알 수 있다. 일반 국민으로선 퇴임 대통령이 어느 동네, 어떤 집에서 사는지 궁금할 수 있다. 그렇더라도 지나친 관심은 도리어 퇴임 대통령에게 부담이 될 수 있다. 꼭 보고 싶다면 여러 명이 몰려가 부산을 떨기보다 조촐하게 주변을 감상하는 정도에 그치는 게 낫지 않을까.
그리고 퇴임 대통령의 집을 굳이 사저라고 일컫는 것도 이젠 재고해 볼 때다. 시대에 맞지 않고 주민에게 거리감만 느끼게 할 뿐이다. 집의 규모도 앞으로는 좀 서민친화적이었으면 좋겠다. 경호 문제를 고려한다고 해도 지나치게 넓은 대지와 높은 담으로 둘러싸인 집은 서민에게는 사실 철옹성이나 다름없다. 소탈하고 친밀한 퇴임 대통령이 되는 데 철옹성 같은 집은 오히려 방해물이다. kms01@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