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 아파트 정원의 매화나무
이종민 종합건축사사무소 효원 대표
새벽부터 마음이 설렌 것은 창틈으로 새어드는 선들바람 탓인지, 아니면 시간을 기억하는 몸의 반응인지 모르겠다. 카메라를 찾았다. 아파트 밑의 매화나무 몇 그루를 생각한 것이고, 어쩌면 늦었을지도 모르겠다 생각했다. 홍매화 소식이 저녁 방송에서 나왔으니 말이다.
‘매화 물 주거라’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남기고 가신 퇴계 선생을 생각한다. 집 마당에 적당한 키의 매화 한 그루 심고 날마다 창을 열어 꽃과 나무를 완상할 처지는 못 되더라도, 매화 봉우리 맺은 모습과 또 며칠 후 그것들이 만개하여 향을 풍기는 순간을 해마다 기대하는 것이다.
개화 시기 맞은 아파트 매화나무
민원에 가지치기 키 절반 잘려
‘공적 녹지’ 개인 부지에 떠넘겨
남은 땅에 방치된 나무들 목격
도심 녹지는 ‘도시 삶의 질’ 좌우
중앙에 넉넉한 정원 두는 ‘상상’
하지만 설렘은 일순간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작년에 매실 몇 개를 주웠던 장소로 달려갔지만, 꽃은커녕 을씨년스럽게 잘린 나무의 윗동이 마른 장작 마구리처럼 볼썽사납다. 아파트 일 층 사람들의 민원이 있었나 보다. 언젠가 관리원들이 가지치기에 열중하더니, 제 키의 절반을 잘린 나무.
소변 마려운 강아지처럼 나무 밑동을 맴돌다가 겨우 몇 개의 움을 찾아내었다. 그 와중에도 나무는 선전하고 있었다. 실과를 맺으려는 본능이라기보다는 절지(切枝)의 아픔을 이겨내려는 모습이다. 카메라에 담길 것은 꽃이 아니라 나무의 의지였다. 나는 중얼거렸다. “무엇이 그리 급했을꼬? 꽃이나 보고 자르든지…”
언젠가부터 매화나무가 훌륭한 조경목의 하나가 되었다. 단정한 키와 구불구불 자연스러운 가지의 모습 때문이 아닐까 생각도 하지만, 기실 이른 봄에 움을 틔우고 꽃을 피워내면서 잠자던 정원을 깨우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한다.
우리의 건축법에는 조경 면적을 강제하고 있다. 건축하려면 대지의 몇 퍼센트를 녹지 면적으로 할애해야 한다. 엄밀히 말하여 시민공원, 시설녹지 등과 같은 공적 영역으로 확보하지 못하는 면적을 개인의 부지에 그 역할을 떠넘기는 것이다.
대부분의 건축주는 조경 면적을 적극적인 장소이기보다는 마지못해 할애하는 곳으로 여긴다. 그 결과 조경은 집을 앉히고 남는 땅에 위치하게 된다. 그리고 1미터 남짓한 건물 사이 혹은 빛이 들지 않는 뒤편 음지에서 죽어가는 나무들만이 가득한 공간으로 방치된다.
특히 아파트의 경우에는 건물과 주차장이나 보행통로 사이의 좁은 공간에 집중되기 마련이어서 정원의 모습은 획일적이기도 하지만, 나무들이 집에 근접 배치되어 또 다른 문제를 일으킨다. 아파트 1·2층에 사는 사람들은 나무의 키가 자라지 않기를 바라게 되고, 민원의 결과로 애써 심은 나무는 채 자라기도 전에 가지를 잘려야 하는 고통을 겪게 된다.
내 집 앞 매화나무들이 그런 처지이고 나는 입춘의 즐거움 하나를 거두어야 하니, 이럴 때가 되면, 나무를 잃은 감상에 앞서 다시 ‘건축과 조경의 관계’에 불만이 앞선다.
녹지의 양은 도시의 질을 보여준다. 그리고 도시계획은 개인보다 먼저 공적 영역이므로 조경 또한 개인의 대지에 강제할 것이 아니라, 공적 부지로 확보해야 한다고 본다. 도시계획과 지구단위 계획의 요점은 사람 사는 영역의 확보에 열중하는 용적률 등에만 있지 않고 다른 데에도 있다. 숨통으로의 도심 녹지가 어떻게 효율적으로 만들어져야 하는 가는 더 중요한 문제이다.
예를 들어, 아파트의 조경을 볼 때마다 드는 생각과 같은 것이다. 나는 가끔 사람과 차의 통로를 따라 선형으로 연결되는 조경이 아니라 단지의 중앙에 제대로 된 넉넉한 정원 하나가 무성하게 조성되는 그림을 그려보곤 한다. 그러면 나무도 잘릴 걱정 없이 마음껏 자라게 되리라. 나의 매화나무 또한 해마다 꽃 피우기에 신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