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동윤의 비욘드 아크] 지방자치와 균형발전의 아이러니
(주)상지엔지니어링건축사사무소 대표이사
지난해 9월 26일 베를린에서는 민간 부동산 기업이 소유한 임대주택을 국유화하자는 시민청원이 투표로 이어졌다. 지방선거와 함께 치러진 투표에서 시민청원은 56.4%의 찬성으로 통과됐다. 같은 달 5일 스위스 글라루스 칸톤(우리나라 행정구역 동에 해당)에서는 코로나로 인해 취소됐던 주민 총회인 란츠게마인데가 2년 4개월 만에 열렸다. 란츠게마인데는 투표권이 있는 주민들이 야외 광장에 모여 칸톤의 주요 안건을 거수로 결정하는 직접 민주주의의 한 형태다. 이날 총회에서 주민들은 신축 건물의 난방 시스템에 화석 연료를 사용하지 않기로 하는 등 19개 안건을 처리했다. 임대주택 몰수와 화석연료를 사용하지 말자는 결과보다도 주민들의 발의로 이뤄진 안건이 투표에 부쳐져 행정으로 이어지는 것이 더 놀라웠다. 지역 문제는 지역민들이 나서서 함께 논의하고 직접 결정하고 책임진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지방분권에 있다. 독립된 의회와 법원, 독자적 법률 제정, 재정자치와 조세권이 스위스 연방법에 명시되어 있다. 독일 또한 헌법을 통해 지방분권을 보장할 뿐만 아니라 지방정부가 입법, 재정, 조직권 등을 독자적으로 가지고 있다. 그러니 헌법 개정부터 세율 조정까지 모두 주민들의 손에 달려 있다. 당연히 각 지방마다 다양한 정책이 끊임없이 아래로부터 올라 온다.
지방소멸, 국가 미래 좌우하는 문제
분권의 토대 있어야 비로소 해결돼
지역 살리기 위해 헌법 개정은 필수
촛불시민혁명으로 탄생한 정권의 임기가 몇 달 남지 않았다. 열흘 후에 있을 다음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후보들은 각 시도를 돌며 지지를 호소하고 있다. 후보들의 토론과 연설을 보고 있으면 전 국민이 촛불로 지키고자 했던 민주주의 가치 회복이라는 시대정신을 계승하려는 의지가 있는지 의문스럽다. 후보들이 전국을 돌며 쏟아 내는 공약은 얼핏 각 지역 발전에 그렇게 진심일 수가 없다. 그런데 정작 각 후보의 10대 핵심공약에서는 부동산 등 성장 개발 공약에 밀려 풀뿌리 민주주의라는 지방자치와 지방분권, 그리고 지역균형발전에 대한 정책은 중요하게 다뤄지지 않고 있다. 그나마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후보와 새로운물결 김동연 후보는 ‘균형발전’을, 정의당 심상정 후보는 “분권을 넘어 지역 민주주의가 확대되는 자치분권을 실현하겠다”며 지방분권 헌법 개정을 추진해 대한민국이 지방분권 국가를 지향하는 점을 명시하고 지방자치단체 명칭을 지방정부로 변경하는 동시에 자치입법권과 자치재정권 보장을 이뤄 내겠다고 밝혔다. 국민의힘 윤석열 후보는 뒤늦게 선거공보 책자에만 9번째로 균형발전, ‘골고루 잘사는 대한민국’을 끼워 넣었다. 그 외 후보들의 핵심 공약에는 자치분권이나 균형발전은 찾아볼 수 없다.
지방소멸이 회자된 지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청년들은 지역을 떠나고 초저출산, 고령화로 인해 소멸 위험 지자체가 226곳 중 85곳에 이른다. 지자체의 4분의 1 이상이 소멸 대상 지역이다. 이 중 비수도권 지자체는 절반 이상이 소멸 위기를 맞고 있으니 이는 곧 국가 경쟁력 약화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지역의 힘을 길러 변화를 모색하고 청년들의 유출을 막고 지속 가능한 도시를 만들자는 것은 이론적으로는 가능할지 모르지만 지방분권과 자치재정권이 보장되지 않는다면 번번이 중앙정부에 의해 무효화되기 십상이다. 중앙집권 과잉으로 인한 수도권 일극화와 지방소멸은 비단 지방만의 문제가 아니라 국가의 미래를 좌우하는 시대정신과 맞닿아 있다.
지역균형발전을 위해 권역별 메가시티 논의가 활발하다. 지난 1월 11일 국가균형발전법 개정안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해 7월부터 시행된다. 지방분권과 지역균형발전은 얼핏 같아 보여도 결은 다르다. 지방분권은 권력을 지방으로 이양하는 통치 개념이라면 지역균형발전은 경제 개념이다. 지방자치는 민주주의와 지방분권을 기반으로 하는 행정 형태다. 지방자치와 지역균형발전은 지방분권의 토대 위에서야 완성될 수 있다.
지난달 13일부터 지방 주민의 참정권 확대와 자치분권 확대를 내용으로 하는 지방자치법 개정안이 본격 시행됐지만 개헌 없이 지방분권은 실질적 힘을 가지기 어렵다. 지방자치 내용 대부분을 ‘법령의 범위 안에서’라는 전제가 중앙집권을 정당화하고 자치입법권을 약화시키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현행 헌법에서는 지방자치단체에 의회를 둔다고 명시되어 있기에 지방의회가 없으면 지방자치단체가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니 개헌을 통해 이 규정을 바꾸지 않는 이상 읍·면·동에 기초자치단체를 만들려면 일일이 의회를 구성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다. 2018년에 대한민국은 지방분권을 지향한다는 헌법 개헌안을 발의했으나 무산된 경험도 있다. 진정한 지방분권을 위해서는 헌법 개정이 필수다.
안토니오 그람시는 “옛것은 죽어 가는데 새로운 것은 태어나지 않는 상황이 위기”라 했다. 지역은 소멸해 가는데 강력한 대책으로 지역을 소생시키지 못한다면 지역의 위기는 머잖아 국가의 위기로 닥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