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물썰물] 시대의 지성
한때 조선의 ‘3대 구라’ 얘기가 횡행한 적 있다. 재야운동가 백기완, ‘방배추’로 알려진 백기완의 절친 방동규, 소설가 황석영, 이 세 사람이 3대 입담꾼으로 통했다. 문단에서는 황구라, 방구라, 백구라라고 불렀다. 구라가 그냥 구라가 아니다. 찢어지게 사무치는 인생사에다 경륜, 지성이 더해져야 진짜 구라다. 백기완 선생은 1년 전 세상을 떴다. 10여 년 전쯤엔 ‘신 3대 구라’ 얘기가 떠돌았다. 당시 2세대 입담꾼으로 새롭게 등장한 이름은 동양철학자 김용옥, 미술사학자 유홍준, 그리고 이어령 선생이었다.
26일 작고한 이어령 선생을 회고하는 데에 달변을 빼놓고 말하기 힘들다. 문학을 바탕으로 인문학 전반을 종횡하는 지성의 필력을 휘둘러 60여 권의 방대한 저서를 낳았다. 하나하나가 빼어난 경지다. 책도 책이지만 서너 시간은 능히 ‘순삭’해 버리는 다변(多辯)은 더욱 놀라운 것이었다. 동서고금을 넘나드는 그야말로 사통팔달의 달변가. 여러 지인의 증언이 있다. 그 말의 기세와 다채로움에 이끌려 정신없이 지적 여행에 동행하다 보면 어느덧 전에 없던 통찰의 문 앞에 서 있더란다.
구라인지 달변인지 다변인지 구분이 안 된다는 말도 있는데, 여느 구라와는 다르다는 의미다. 통상 그것과 함께 갖춰지기 힘든 인문학적 깊이를 가리킨다. 박학과 다식을 보여 주되, 결코 가볍지 않다. 도발적 상상력, 독특한 사유와 함께 자신만의 철학이 내장돼 있어서다. 그 바탕은 엄청난 독서량과 날카로운 현실 탐구에 있다. 이 지식인을 순수·참여 같은 틀에 가두는 일은 무의미하다. 선구적 안목은 2004년 저서 에 잘 드러난다. 디지털 시대일수록 종교와 철학으로 뒷받침되는 아날로그 지성이 중요하다는 갈파다. 나라의 미래를 위해 작은 공동체로서의 ‘로컬’을 강조한 대목도 특별한 눈길을 끌기에 충분하다.
지성의 종착점은 영성이었다. “인간은 초월하는 상상력을 가졌다. 이는 신의 세계와 상통한다.” “우주에서 선물로 받은 이 생명처럼, 내가 내 힘으로 이뤘다고 생각한 게 다 선물이더라.” 그는 마지막까지도 생의 본질을 추적하는 지적 활동의 끈을 놓지 않았다. 지난달 출간한 에서 말한다. “(코로나19 팬데믹 시대는) 죽음을 통해 황폐화된 개인을 응시하게 된 것이다. 죽음이 우리 사회를 어떻게 변화시킬지 두고 볼 일이다.” 생명은 축복이고 죽음은 그것을 돌아보게 한다는 얘기. 그는 갔지만 금강석 같은 지혜가 남았다.
김건수 논설위원 kswoo333@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