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물 썰물] 카수스 벨리
이병철 논설위원 peter@
전쟁을 일으키거나 정당화하기 위해 사용되는 명분이나 이유를 라틴어로 ‘카수스 벨리(Casus Belli)’라고 한다. 17세기 네덜란드 출신 국제법학자·외교관으로 유럽에서 벌어진 30년 전쟁의 비참한 현실을 직접 체험한 휴고 그로티우스(Hugo Grotius)는 저서 <전쟁과 평화의 법>을 통해 인류를 전쟁의 참화로부터 지키기 위해 ‘국가가 분쟁에 참여한다고 주장할 수 있는 정당한 이유가 필요하다’라는 뜻으로 카수스 벨리 이론을 제시했다. 국가가 전쟁을 개시할 때는 최후의 수단으로 전쟁을 하는 ‘정당한 명분’이 있음을 보여 줘야 한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정당한 전쟁의 명분이 없을 때는 구실을 찾거나 누군가에게 상대방을 공격하라고 시키거나, 거짓 증거를 만들기도 했다. 카수스 벨리를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면 정치적 의도가 있는 전쟁, 불의의 전쟁으로 치부되기 때문이었다. 이는 전쟁 당사자인 국가로서도 전쟁에 대한 국민의 내부 합의와 지지, 잠재적 동맹국의 지원을 얻기 위해서도 중요하다.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6일째를 맞고 있는 우크라이나 침략에 대해 ‘탈나치화, 돈바스 지역 러시아 민족 인종 학살 방지’가 전쟁의 명분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러시아에 비교적 우호적인 독일의 올라프 숄츠 총리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 여부를 카수스 벨리로 내세웠지만, 이번 전쟁은 어떤 명분으로도 정당화될 수 없다”라고 정면으로 반박해 명분 전쟁이 한층 뜨거워졌다. 러시아가 명분 전쟁에서 이긴다면 전쟁은 생각보다 빨리 끝나고, 나토 국가와의 확전 가능성도 줄어들게 되기 때문이다.
우크라이나 국경선 침범 등 선제공격과 국제법상 금지된 대량 살상 무기를 사용한 민간인 폭격, 유대계 대통령에 대한 탈나치 운운으로 러시아가 명분 전쟁에서 이미 패하고 있다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이런 이유로 전쟁 발발 처음에는 주저하던 독일과 체코, 폴란드 등 EU 국가와 미국 등이 우크라이나에 무기를 보란 듯이 공급하면서 전쟁이 길어질 것으로 보인다. 특히, 서방 국가들이 국제금융결제망(SWIFT)에서 러시아 은행을 차단하는 핵폭탄급 제재에도 전례 없이 동참하고 있다.
일단 시작하면 거창한 명분은 사라지고, 무고한 인명을 살상하고 수천 년 쌓은 문화를 허물어 버리는 전쟁을 정당화하는 명분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정의의 전쟁은 없기 때문이다. 우크라이나 국민의 안녕을 기도한다. 이병철 논설위원 pet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