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영희와 함께 읽는 우리 시대 문화풍경] 지금, 이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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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대 대학원 예술·문화와 영상매체협동과정 강사

바니타스(vanitas)는 허무함을 뜻하는 라틴어다. 세속적 삶의 덧없음과 죽음의 필연성을 표현하는 예술작품에 자주 원용한다. 17세기 네덜란드를 중심으로 큰 인기를 끌었던 바니타스 정물화가 특히 유명하다. 죽음의 확실성과 세속적 삶의 부질없음을 상기할 수 있도록 다양한 오브제를 사용한다. 가령 진귀한 박물과 음식, 화려한 꽃과 보석이 쾌락과 영화를 상징한다면, 시들어가는 꽃, 썩어가는 음식, 시계, 연기, 해골, 악기는 삶의 유한성을 표상한다. 화가들은 이 오브제들을 마치 실물처럼 생생하게 그렸다. 극도로 사실적인 묘사는 작품의 메시지를 더욱 분명하게 시각화시켰다. 대비되는 두 영역이 한 화폭에 공존하지만 조화롭다. 미적으로도 아름답다.

바니타스 정물화는 네덜란드의 황금기라 불리는 시기에 유행했다. 해상무역의 번창에 따른 물질적 풍요를 바탕으로 문화예술의 전성기를 구가하였다. 동인도회사의 역할이 컸다. 식민지를 기반으로 독점무역권을 행사한 덕분에 막대한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종교개혁 이후 개인의 중요성에 대한 자각도 바니타스 정물화의 생산을 부추겼다. 상공업으로 부를 축적한 개인은 자신의 부를 과시하는 한편 인생의 덧없음에 대한 자각과 종교적 신념을 보여주기 위해 바니타스 정물화를 주문했다. 바니타스 예술은 비단 과거의 유산만은 아니다. 거대 다국적기업의 독점무역과 주식 및 가상화폐 시장의 출렁임 속에 막대한 부의 생성과 재편이 가파르게 이루어지는 이 시대, 현대미술에서 바니타스는 즐겨 재현하는 주제이기도 하다. 데이미언 허스트(Damien Hirst)의 는 해골에 8601개의 다이아몬드를 박아 넣은 작품이다. 화려하고 찬란하게 빛나지만 본질적으로 죽음을 상징하는 해골이 오브제다.

얼마 전 이어령 선생의 타계 소식을 접했다. 우리 시대 지성을 대표하는 석학이었다. 견고한 지성은 사랑하는 딸의 거듭되는 불행 앞에 속절없이 무너졌다. 당신이 소유한 지성이나 돈, 지위는 한갓 검불에 지나지 않았노라 고백했다. 딸 이민아 목사는 삶에 닥친 모든 고난을 세상의 밀알로 승화시키고 10년 전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는 딸의 간곡한 청에 따라 기독교인이 되었으며, 지금껏 지성과 영성을 넘나들며 수채화처럼 맑은 삶의 지혜를 남기고 소천했다. 생의 모든 것이 선물이었다며 기꺼이 작별을 고했다.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죽음을 기억하라. 모든 생명은 언젠가 죽음을 맞이한다. 그러나 죽음을 인식할 수 있다는 사실은 실로 축복이다. 죽음과 맞닿은 삶, 그 유한함을 알기에 우리는 삶의 가치를 추구한다. 바니타스 예술이 전하는 진짜 메시지는 죽음의 공포가 아니라 삶의 가치다. 생애의 모든 나날이 보석처럼 빛나야 할 이유다. 지금, 이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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