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설위원의 시선] 굴러온 바둑 용어, 정치권 점령하다
적과 동지 나누는 ‘갈라치기’, 결국 ‘자리 다툼’ 때문
손아람 작가는 얼마 전 올해 최악의 단어로 ‘갈라치기’를 꼽았다. 사실 갈라치기만큼 요즘 정치권이 애용하는 단어가 없다. 원래는 바둑 용어로 상대편의 돌이 두 귀에 있는 경우 변(邊)의 중앙 부분에 돌을 놓아 아래위 또는 좌우의 벌림을 꾀하는 일이라는 뜻이다. 2000년대 중반 이후 정치권 용어로 정착해 특히 지난 대통령선거를 전후해 남용되고 있다. 그 결과가 국민의힘 윤석열 후보 48.56%,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후보 47.83%다. 나라가 쪼개졌다. 선거가 끝나도 통합은커녕 진영이 갈려 혼란이 극심하다. ‘갈라치기’는 원래 자리인 반상(盤上)으로 돌아가야 한다.
문 대통령 40%대 지지율 유지
‘편 가르기’로 내 편 결속 효과
국힘, 젠더 갈등으로 대선 승부수
젊은 여성 반발로 큰 성과 못 내
여야, 대선 후에도 반성엔 소홀
언론 편향성 탓하며 개혁만 외쳐
대통령, 임명직 인사권 너무 많아
권한 축소해 ‘국민통합’ 나서야
정치, 내 편과 네 편 나누는 일
2년 전 정치와 무관한 한 지인의 출판기념회에 갔을 때의 일이다. 보궐선거로 당선된 민주당 한 국회의원이 축하 인사를 하면서 “정치는 적과 동지를 나누는 일이라고 배웠다”라는 말을 했다. 국회의원 배지를 단 지 얼마 되지도 않는 초선의원이 왜 그런 이야기를 하는지 의아했다. 독일 정치학자 카를 슈미트가 “정치적 구별이란 적과 동지의 구별이다”라는 말을 했다는 사실은 나중에 알았다. 공교롭게도 이 인물은 그해 10월 금태섭 전 의원의 민주당 탈당 메시지에 또다시 등장했다. 금 전 의원은 “카를 슈미트는 정치는 적과 동지를 구별하는 것이라는 얼핏 보기에 영리한 말을 했지만, 그런 생각이 결국 약자에 대한 극단적 탄압인 홀로코스트와 다수의 횡포인 파시즘으로 이어졌다. 생각이 다른 사람들의 선의를 인정해야 한다. 특히 집권 여당은 반대하는 사람도 설득하고 기다려서 함께 간다는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라고 했다.
문재인 대통령의 국정 지지율이 퇴임을 앞둔 지금도 40%대라는 사실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한때 문 대통령의 멘토였던 윤여준 전 환경부 장관은 “말로는 통합을 부르짖으면서 실제 행동은 5년간 내 편 네 편 갈라치기를 했다. 그렇게 내 편 지지 결속력을 가져가니까 40%대 지지율이 유지된다”고 비판한다. 대선 패배 이후에도 민주당이 변하지 않는 모습을 보면 아직도 멀었다는 한탄이 절로 나온다. 채이배 민주당 비상대책위원은 “청와대와 민주당은 지난 5년간 꾸준히 내로남불·편 가르기·독선 등 나쁜 정치를 하며 국민의 마음을 떠나보냈다. 문 대통령이 퇴임사엔 반성문을 남기고 떠났으면 한다”라고 입바른 소리를 했다. 그러자 친문 강성 의원 15명이 나서서 채 위원의 공식 사과를 요구했다. 퇴임사에 반성이 담겨야 한다는 말도 못 하나.
‘여성가족부 폐지’ 일곱 글자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은 선거 기간 <워싱턴포스트>와의 서면 인터뷰에서 자신을 ‘페미니스트’라고 했다가, 실수였다며 말을 바꿨다. 그 뒤 ‘여성가족부 폐지’라는 일곱 글자 공약을 SNS에 재차 올렸다.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가 주장한 ‘세대포위론’으로 입장을 바꾼 것이다. 다시 말해 ‘젠더 갈등’을 활용해 20대 남녀를 갈라치겠다는 전략이었다. 박빙으로 나타난 대선 결과는 젠더 갈라치기가 성공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선거 막판 2030 여성은 이재명 민주당 후보로 결집했다. 젊은 여성들이 심상정 정의당 후보에게 후원금을 보내며 이해를 구할 정도로 국민의힘 반대 투표가 일어난 것이다. 이준석 대표는 지금이라도 2030 남녀 갈라치기에 대해 사과해야 한다.
결국 여성가족부는 폐지될까. 인수위원회가 여성가족부 추천 파견공무원을 모두 배제한 모습을 보면 그럴 것도 같다. 김종인 전 총괄선거대책위원장은 “젠더 갈등 문제가 표심을 완전히 갈라놓았다. 무조건 여가부를 폐지하면 그 갈등 구조를 촉진할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 대통령이 갈라치기를 하면 어떻게 되는지 잘 지켜보지 않았던가. 국민통합을 위한 길이 무엇인지 깊은 고민이 필요한 때이다.
모든 게 기울어진 언론 탓?
옛말에 잘못되면 조상 탓이라더니 모든 게 언론 탓이다. 언론 환경이 기울어졌다는 이야기는 여야 양쪽에서 나온다. 윤 당선인은 대선을 불과 사흘 앞두고 “민주당 정권이 강성노조를 앞세우고 갖은 못된 짓을 한다. 그 첨병이 바로 언론노조다. 이것도 정치 개혁에 앞서 먼저 뜯어고쳐야 한다”라고 말했다. 당선인은 언론과의 소통을 약속하지만, 그의 언론관은 상당히 우려스럽다. 지난 16일 ‘공영언론 어떻게 바뀌어야 하나’를 주제로 국민의힘 의원들이 개최한 국회 토론회에서는 공영방송의 편파성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왔다. 이날 황보승희 의원은 “스스로 왜곡 편향된 사람들이 언론사 주력 세력이 됐다. 우리는 그것이 잘못됐다는 것을 알고 언론인들이 자율적으로 국민을 위해 비판 목소리를 낼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데 주력해야겠다”라고 의미심장한 이야기를 했다.
한편 윤호중 민주당 비상대책위원장은 검찰·언론개혁을 새 정부 출범 전에 매듭짓겠다고 했다. 민주당 초선의원들도 기자회견을 열어 “언론개혁도 추진해야 한다. 국회 언론·미디어 제도개선 특위 활동 기한 안에 공영방송 지배구조를 개선하고 자율규제 기구를 설치해 언론의 독립성을 키우면서도 가짜뉴스를 근절해야 한다”고 밝혔다. 여야 공히 언론 개혁을 외치면서도 언론 환경을 너무 다르게 본다. 그 이유는 이들의 언론 활용법을 보면 알 수 있다. 당선인은 퇴사한 지 사흘도 안된 강인선 조선일보 부국장을 21일 외신대변인으로 임명했다. 민주당도 다르지 않았다. 지난 1월 JTBC 이정헌 기자와 YTN 안귀령 앵커는 민주당 대변인으로 직행했다. 언론인 영입이 언론의 독립성을 침해하는 것 아니냐는 지적에 대해서는 늘상 자신들이 하는 건 괜찮다고 한다. 사직서에 잉크도 마르기 전에 정치권으로 향한 기자들이 물론 잘못이지만, 그렇다고 언론 탓만 할 수 있을까. 지난 대선에서 기울어진 언론 환경을 탓할 사람은 정작 정의당과 같은 소수당과 군소 후보들이었다.
부산대병원장까지 청와대가 결정
지난 18일 자 <부산일보>에는 다음 달 초 임기가 시작되는 부산대병원 병원장 인선권을 문재인 정권과 새로 들어서는 윤석열 정권 중 어느 쪽이 행사해야 하는지를 두고 논란이라는 기사가 실렸다. 국립대 병원장·국립대 총장의 인사권을 사실상 청와대가 행사해서 생기는 문제다. 청와대가 임명한 병원장은 지역의 이익이나 내부 구성원 입장보다 인사권자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다. 법률로 규정된 대통령 임명직만 1만여 개, 그 밖에 대통령이 실질적 권한을 행사하는 자리는 무수히 많다. 미국 대통령이 임명하는 자리는 2000~3000개에 불과하다고 한다. 우리 대통령이 얼마나 힘이 센지, 왜 그렇게 여야가 사생결단인지 짐작이 간다.
지난 대선 때 내건 공약만 봐도 여야 정당의 이념적 차이가 크지 않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지금의 정치 현실은 이념보다 자리를 놓고 싸우는 것으로 보인다. 강준만 전 전북대 교수는 “정치의 전반적인 보수화 체제에선 큰 이슈를 놓고 싸울 일이 없어진다. 하지만 ‘싸움 없는 정치’는 생각할 수 없으므로 여야 정당은 사소한 차이를 큰 것인 양 부풀리는 싸움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 싸움에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것은 ‘적 만들기’이며, 상대 정당은 물론 그 정당을 지지하는 시민들까지 적으로 삼는 수준으로 이어진다”라고 말했다. 대통령에게 주어진 너무 많은 인사권은 사회를 갈라놓기 쉽다. 정권에 따라 정치적 가치와 무관한 곳까지 물갈이가 이루어지는 정치 만능의 상황을 언제까지 반복해야 하나.
최근 당선인 특별보좌역을 맡은 국민의힘 박수영 의원은 “법령 개정을 통해 대통령의 권한을 임명직 400~500개 정도로 축소하고 나머지 자리는 권한 이양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갈라치기만큼 국민통합을 해치는 것이 없다. 갈라치기를 불러온 제왕적 대통령의 너무 많은 인사권, 이번에는 내려놓을까….
박종호 수석논설위원 nleader@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