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약 무기 최초 '조병창' 만든 고려 최무선 [자주국방 인in人] 10
[자주국방 인in人] 10. 화약 무기 선구자 최무선
우리나라 화약 무기의 선구자이자 최초의 화약 무기 조병창을 만든 최무선(1325~1395)은 진짜 별이 되었다. 경북 영천시에 있는 보현산천문대에서 전영범 박사 등이 최초 발견한 소행성 다섯 개가 있었다. 한국천문연구원이 국제천문연맹에 이 소행성의 이름을 '최무선 별'로 명명해 달라고 요청해 2004년 최종 승인을 얻었다. 그해 최무선 별과 함께 이천 별, 장영실 별, 이순지 별, 허준 별도 이름을 얻었다.
전민욱(60) 경상북도 문화관광해설사는 “한국천문연구원이 소행성의 이름을 과학기술인 명예의 전당 과학자 14명 가운데 출생연도 순으로 헌정하고 있었는데 영천 출신 최무선이 인물로는 최초로 별 이름으로 등재됐다는 사실이 매우 자랑스럽다”고 말했다.
최무선은 잘 알려졌듯이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화약을 이용한 무기를 제작하고, 당시 첨단기술이었던 화약제조법을 알아냈으며, 무기개발 전문기관인 화통도감을 설치했다. 그가 만든 화약 무기는 당시 왜구 격퇴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는 여말선초 정치 사회 변화에도 큰 영향을 끼친다.
선현의 활약 영호남 화합에도 한몫
“매년 4월 21일 과학의 날을 맞아 최무선 추모제를 여기 영천시 최무선과학관에서 지냅니다. 이날은 전북 군산시에서도 추모단이 방문하지요. 1380년 진포대첩으로 호남 지역을 위기에서 구한 최무선 장군을 기리기 위해서랍니다.” 전 문화해설사는 곡창지대 전라도를 침범한 왜선 500여 척을 최무선이 직접 개발한 국산 화약 무기로 무찌른 진포대첩은 전쟁사적 의미도 크지만, 왜구로 인해 도탄에 빠진 백성을 구한 의로운 일이었다고 설명했다.
“진포는 지금의 금강하구에 있던 항구도시였습니다. 왜구가 곡창 전라도에서 얼마나 많은 쌀을 수탈했던지 마을에서 포구로 이어지는 길에 한 자 높이의 떨어진 나락이 쌓였다고 합니다.” 전 문화해설사는 “야사에 전하는 이야기지만, 왜구가 어린아이를 제물로 삼았다고도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최무선의 활약은 군산(진포) 일대 지역민에게는 희망이었을 겁니다.” 43년째 경북도에서 향토사를 연구하고, 20년 이상 문화해설을 해 온 전 문화해설사의 이야기보따리가 한번 풀리니 거침없었다.
최무선 가계의 비밀을 듣게 되다
“최무선과학관 자리는 원래 초등학교였어요. 당시 학교는 학생 수가 점점 줄어들어 폐교가 예정돼 있었는데, 과학관 위치를 결정해야 할 시기여서 1년 일찍 문을 닫았죠. 동창회가 나서 일을 많이 도왔습니다. 최무선 생가지는 지금 과학관에서 200여m 떨어진 복숭아밭이라고 추정해요. 거기에 작은 안내비가 있습니다.” 전 문화해설사의 말로는 지역민들의 최무선 사랑 의지가 무척 강했다고 했다. 영천시 방문단이 몇 년 전 최무선의 묘소가 있는 것으로 알려진 북한 개성시에도 다녀왔다고 했다. “개성 관광이 허용되던 마지막 시기였습니다. 개성을 방문해 북측 안내원에게 옥룡사를 물었는데 모른다고 하더라고요. 문헌에는 최무선의 묘소가 옥룡사 인근이라고 기록돼 있습니다.”
최무선은 영천시 금호읍 원기리 마단 마을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출생은 영천에서 했지만, 고려 때 관리의 월급을 담당하는 직책인 광흥창사 최동순의 아들이었기에 주로 개경에서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고려나 조선이나 녹봉이라는 것이 쌀이나 소금이었습니다. 왜구가 주로 노린 것도 쌀이고요. 추정하기로, 왜구의 침탈로 조공선이 제때 올라오지 못하면 노심초사하던 아버지를 보고 최무선이 화약 무기를 개발할 결심을 더욱 깊게 하지 않았을까요.” 전 문화해설사는 역사적 사실과 상상력을 보태 말했다. 일설에는 최무선이 부인에게 “내가 죽으면 아들이 자란 뒤 화약 제조 비법을 전하라”고 했다는데 이는 조금 인정하기 어렵다는 설명도 했다. “고려 때 평균수명이 40대 중반에 불과했고, 아들 해산은 최무선 사망 시기 16세로 당시 성년 나이였다”며 최무선이 나이 50 중반에 아들을 얻었다는 이야기도 1000년 전의 일이라 모든 것이 요즘처럼 명확하지는 않다고 말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가, 화약 제조법을 익히고, 화약 무기를 만들고, 그 무기로 왜구를 무찔렀다는 사실이다.
화약제조법을 익힌 화약 무기 국산화의 선구자
“최무선이 만든 ‘주화(走火·화살 로켓의 일종)’가 신기전의 원형입니다. 저희가 신기전을 직접 만들어 발사 시험도 했는데 600m나 날아갔습니다. 로켓박사 채연석 박사 말로는 화약을 제대로 넣으면 1.5km도 너끈히 날아간다고 하더라고요.” 신기전 실험은 화살 하나 만드는데 10만 원 정도 예산이 소요돼 몇 차례로 그쳤다고 실험에 참여했던 전 문화해설사가 말했다. 한 번은 사람이 없는 산으로 화살을 쏘고, 사람을 풀어 수거하기로 했는데 100발 중에 20발 정도만 찾을 수 있었다고 했다.
‘최무선이 우리나라 최초로 화약을 발명했다’는 명제에 관해서 역사학자들은 수긍하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나라 최초로 ‘화약제조법을 익히고 화약 무기를 만드는 화통도감을 세웠다’란 것이 적확하다는 것이 정설이다. 최무선은 국내에서 최초로 국가 차원에서 공식적인 화약 무기 관련 시스템을 만든 분이라는 것이다.
전쟁사 연구자인 박제광 건국대박물관 학예실장은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실용성 있는 염소 제작 제조법을 습득하여서 자체 생산한 분이 최무선”이라고 말했다.
“최무선 선생은 화약과 화약 무기를 체계적으로 연구하고 만들어 국산화에 성공했습니다. 중국에 이어 두 번째 화약 무기 보유국이 되는 데 헌신하신 분입니다.” 박 학예실장은 최무선으로 인해 화약무기 규격화·표준화가 유럽보다 3세기가 앞섰다고 논문에 썼다. 물론 최초의 화약 무기 연구기관인 화통도감을 설립한 것은 오늘날 국방과학연구원이나 국방부 조병창의 원조 격이라는 것이다.
유럽보다 3세기 앞선 최무선의 화약 표준화
최무선은 흔히 알려진 것처럼 우리나라에서 화약을 발명하지는 않았다. 다만, 중국 등의 여러 기술을 익혀 우리나라 최초로 화약을 만들었다. 박 학예실장의 관련 논문에 따르면 고려 숙종 9년(1104)에 이미 여진 정벌 과정에 발화대라는 특수부대가 편성 운용된 것으로 봤다. 발화대가 공식 화기 부대인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당시 몽골은 이미 화기를 사용하고 있었기에 화약 무기 부대로 유추할 수는 있다고 박 학예실장은 말했다.
1274년 고려 충렬왕 원년에 여원연합군이 일본 정벌 때 사용했던 철포도 화약 무기의 일종이며, 1356년 공민왕 5년에 총통 발사 기록도 있단다. 공민왕은 왜구를 상대할 화약 무기와 화약 지원을 명나라에 요청한 기록도 있다. 최무선 이전에 이미 고려에는 화약과 화약 무기가 도입돼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박 학예실장은 말했다. “고려말 왜구의 침입이 잦아지며 고려에서의 독자적 화약 제조 필요성이 높아졌습니다. 화약 무기를 만들 기술력은 당시 충분했던 것으로 보이고요. 최무선은 비범한 관찰력으로 우리나라 최초로 실용성 있는 염초 제조법을 습득해 자체 생산한 사람이라는 것에 큰 의의가 있습니다.” 박 학예실장은 최무선이 중국인 이원으로부터 화약제조기술을 익혀 염초의 정제 방법을 연구해낸 것이 큰 성과라고 밝혔다.
화약 제조의 관건 염초의 국산화
최초의 화약인 흑색화약은 유황과 염초, 숯가루를 섞어 만들었다. 배합비가 중요한데 국립진주박물관이 조선화약의 성능을 분석한 자료에 따르면 초기 화약인 흑색화약 성분비가 한국 중국 일본 등 동양 3국이 제각각 달랐다. 이상적인 배합비가 폭발력을 강화하는데 배합비를 토대로 유추하면 왜약(일본 화약)이 가장 우수했다. 명화약(중국 화약)은 상대적으로 효율이 떨어졌으며, 조선화약의 경우 기록물마다 차이는 있지만, 왜약과 명화약 중간 성능 정도인 것으로 확인했다.
최무선 당시의 화약 성분 구성은 염초석 75%, 유황 10%, 목탄 15%로 돼 있다. 최무선은 수십 차례의 실험으로 최적의 혼합 비율을 찾은 것으로 보인다.
원시 화약 제조 기록은 9세기 중반 중국 서진시대 정은이 쓴 ‘진원묘도요략’에서 언급된다. 2세기부터 도교의 영향으로 단약을 만드는 일이 활발했던 것이 중국에서 화약의 발전을 가져왔다. 명나라 의서 본초강목에는 화약이 장티푸스를 치료하는 약재로 기록돼 있고, 허준의 동의보감에도 초석 성분이 포함한 아궁이 흙 등이 약재로 언급되기도 했다.
송나라는 기마민족을 상대하기 위해 화약 무기를 사용했고, 그 상대국인 금나라와 몽골도 곧 시술을 습득했다. 몽골군의 유럽 원정은 유라시아 전역으로 화약 무기가 전파한 계기가 되었다.
우리나라는 최무선으로 인해 동양에서 중국 다음으로 화약 무기를 국산화한 화약 선진국이 되었다. 이는 곧 이어지는 나라 조선이 ‘화력 조선’으로 불릴 만큼 화약 무기 강국이 되는 초석이 된다.
박 학예실장은 “고려의 금속 기술 또한 거대 불상을 창조해낼 정도로 발달해 지금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수준이 훨씬 높은 것이었다”며 “팔만대장경에 쓰였던 순도 97~99%의 마구리 구리판을 만든 고려 장인들의 놀라운 금속 기술이 화약 무기를 제조하는 데 맹활약했다”고 말했다.
규격화된 화약무기가 조선해양 기술의 발전 견인
“화약 무기로 왜구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진포해전에서 활약한 고려 평저선이 향후 조선 기술의 발전을 가져왔고, 현재 대한민국이 조선 강국인 것도 이런 전통이 없었다면 불가능했다.” 박 학예실장은 고려의 특유한 배 형태에 주목했다. 조수간만의 차가 심한 우리 서해는 썰물 때 배가 옆으로 기울지 않도록 바닥이 평평한 평저선을 만들었다. 평소에는 조공선으로, 전쟁 때는 전함으로 활용한 이 배는 화포를 운용하는 데도 큰 장점이 있었다. 배에서 화포를 발사하면 반동력으로 충격을 받아 배가 한쪽으로 기우는데 평저선은 진동에 영향을 상대적으로 덜 받았다.
박 학예실장은 “최무선은 화포 운용에 적합한 선박을 건조해 화약 무기의 효과를 극대화했다”며 “최무선이 직접 참전한 진포해전과 1383년 정지 장군이 출정하여 대승한 관음포해전으로 해전의 자신감을 가진 고려가 기존 왜구의 침입에 수세적인 태도에서 벗어나 마침내 1389년 창왕 원년에 대마도를 정벌한 자신감으로 이어졌다”며 화약 무기를 주로 사용한 진포해전과 관음포해전은 세계 해전사에서도 매우 중요한 전술적 의미가 있다고 밝혔다.
최무선의 아들 최해산 대를 이어 화약 무기를 개발
1395년 최무선이 사망한 해 아들 해산은 16세였다. 1389년 고려 창왕 1년 최무선의 화통도감은 정치적인 이유 등으로 철폐된다. 최무선은 집에서 ‘화약수련법’과 ‘화포법’을 저술했다. 아들 해산은 이러한 책을 바탕으로 연구에 힘썼다.
1392년 조선이 개국했다. 조선 태조는 최무선의 공을 인정해 벼슬을 하사했다. 최무선이 죽은 후 의정부 우정승에 추증하고 영성부원군에 추봉한다. 영성은 지금의 영천시를 일컫는다고 전 문화해설가 설명했다.
해산은 이후 최무선의 기존 향초법을 개선하여 생산효율을 높인 당염초법을 고안했다. 또한 아버지의 화약 비법을 더욱 발전시켜 신형 화약 무기 개발에도 힘썼다.
해산은 1409년(태종 9년) 수레에 화기를 장착한 병기 화차를 개발했다. 신무기의 탄생이었다.
제주안무사, 중추원부사, 강계절제사를 두루 거친 해산은 화차, 완구, 발화, 신포 등 신화기를 만들었다. 해산이 화약 무기 발전에 매진한 당시 조선초기 조정은 화포발사군 1만 명을 확보하며 화력 조선의 기틀을 제대로 닦았다.
박 학예실장은 “고려 말 급진적으로 발전하던 화약 무기는 1392년 조선왕조가 건국된 이후 일시적으로 주춤하다가 이후 부국강병책으로 새롭게 인식되면서 재도약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최무선과 해산 부자의 화약 무기 개발 공적은 오늘날 자주국방이 있게 한 빛난 얼이다. 고려말에서 조선으로 이어진 화약 무기의 계승이 오늘날 자주국방의 든든한 뿌리였다.
요산 김정한 선생은 1973년 11월 29일 국방부 조병창 건립 기념 비문에 이렇게 새겼다. '국방은 한 나라의 존립을 보장하는 최대의 요건. 방비를 등한히 해 외적의 침략을 받았던 치욕스러운 역사를 다시는 되풀이 말자. 여기 자주국방을 다짐하는 무기 생산의 터전을 마련했다. 우람한 가동 소리는 조국의 영원한 안전과 자유를 굳건히 보장하리라.' 선생의 말씀을 축약했지만 대한민국 자주국방의 시원이 부산 기장군 철마면 전 국방부 조병창이다. 조병창은 (주)대우정밀로 민영화한 뒤 현재 SNT그룹(회장 최평규)의 SNT모티브로 발돋움했다. 시대는 바뀌었지만, 자주국방의 대의는 면면히 이어진다. 그 거룩한 여정에 묵묵히 복무한 이들을 발굴해 <부산일보>는 ‘자주국방 인in人 시리즈’를 지면과 온라인에 연재한다. 모든 영웅들의 이름을 일일이 부를 날이 반드시 오리라 믿는다.
이재희 기자 jaehee@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