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영희와 함께 읽는 우리 시대 문화풍경] 쇼스타코비치의 음악과 봄의 광휘
부산대 대학원 예술·문화와 영상매체협동과정 강사
도레미파솔라시. 계이름(syllable name)이다. 중세 음악이론가 귀도 다레초가 노래를 쉽고 빠르게 배울 수 있도록 음에 붙인 이름이다. 음계에 붙였기 때문에 기준음이 달라지면 계이름도 달라진다. 상대적 위치가 아니라 고유한 음높이에 붙인 음의 이름을 음이름(pitch name)이라 한다. 나라마다 음이름은 다르다. 우리나라는 다라마바사가나, 영미권에서는 CDEFGAB라 부른다. 독일에서는 B가 H다. 변화표나 사이음이 들어가면 좀 더 복잡해지는데 독일에서 B는 영미권의 Bb에 해당한다. 작곡가들은 음이름으로 음형 패턴을 만들어 사용하기도 한다. 가령 B-A-C-H는 바흐에 대한 존경의 표현으로 즐겨 사용했다. 슈만과 브람스, 디트리히의 공동 작품 는 ‘자유롭지만 고독하게(Frei aber einsam)’라는 독일어 문구에서 비롯됐다. 낭만적 기풍이다.
소련 작곡가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의 음형 패턴은 이러한 낭만과는 무관한 비장함으로 물들어 있다. “내 교향곡 대부분이 묘비다. 너무 많은 국민이 죽었고 그들이 어디에 묻혔는지도 알지 못한다. 내 친구도 여러 명 그런 일을 당했다. 메이예르홀트나 투하쳅스키의 묘비를 어디에 세우겠는가?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것은 음악밖에 없다.” 메이예르홀트는 전위적 이론과 대담한 무대 구성으로 유명한 연출가다. 투하쳅스키는 소련군의 총참모장을 지낸 전쟁영웅이자 음악애호가였다. 쇼스타코비치와 교분이 깊었던 이들은 인민의 적, 나치 스파이로 몰려 숙청당했다. 사회주의 프로파간다에 앞장섰던 기회주의자 또는 압제에 저항했던 예술가. 쇼스타코비치에 대한 이러한 상반된 평가는 오늘날도 여전하다. 제정 러시아 시대에 태어나 러시아혁명과 제1, 2차 세계대전, 스탈린 독재까지 그가 감당해야 했던 역사의 굴곡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스탈린 공포정치기에 이루어진 편집증적 조사 때문에 끊임없이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들어야 했다. 벗들의 애통한 죽음을 애도하지 못하고 묘비명을 오선지 위에 암호처럼 새겨 넣을 수밖에 없었다.
쇼스타코비치의 음악은 절망이나 무거움과 연결되곤 하지만 밝고 경쾌한 춤곡도 많다. 는 영화 , 의 삽입곡으로 큰 인기를 얻었다. 도 그중 하나다. 소비에트의 생물학자 미추린의 전기영화 (1949)을 위해 작곡했다. 동토를 뚫고 솟구치는 맑은 시냇물과 형형색색 꽃망울이 터지는 풍경이 눈앞에 환하다. 음악으로 표현한 봄의 전령이다. 가혹한 억압과 통제 속에서 음악에 새겨넣은 비장한 암호들이 시대를 읽어내는 코드가 되듯이, 폐허의 영토에도 혁명처럼 봄은 온다. 이날에는 죽음조차 생명으로 되살아나지 않는가. 신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