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광식의 인문예술 풀꽃향기] 드네프르의 달밤
전 고신대 총장
러시아 발다이 구릉에서 발원한 후 벨라루스를 거쳐 우크라이나 중앙을 관통하여 흑해로 들어가는 강이 드네프르강이다. ‘모든 강의 어머니’라고 불리는 이 강은 물이 맑은 데다가 강변 풍광도 빼어나 강만 찾아 세상을 떠돌던 어느 방랑객의 말처럼 ‘길을 따라 만난 세상의 가장 아름다운 강’이기도 하다. 이 고요하고 아름다운 강이 지난 한 달 동안 러시아의 침략으로 슬픔과 눈물의 강이 되고 있다. 그런데 드네프르가 아픔을 겪은 것은 지금뿐만 아니다. 종전이 가까웠던 1943년, 독일과 러시아가 이 강을 두고 제2차 세계대전 중 가장 치열했던 ‘드네프르 전투’를 치렀는데, 사상자가 무려 270만 명에 이를 정도로 이 강은 그해 여름부터 크리스마스이브에 이르기까지 피의 강이 되었다.
‘모든 강의 어머니’ 맑고 빼어난 풍광
우크라이나의 자연 담담히 담아낸
화가 쿠인지의 고적한 풍경화 그리워
다리가 이 마을과 저 마을, 윗동네와 아랫동네를 연결해 주는 인위적 장치라면, 그 밑으로 흐르고 있는 강은 산과 바다 그리고 이 나라와 저 나라를 이어 주는 자연적 고리이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무참히 공격하는 이 순간도 드네프르는 묵묵히 흐르면서 발다이 구릉과 흑해,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를 잇고 있다. 드네프르는 고래로부터 활발한 문명교류의 장이었다. 교역을 위해 러시아인들과 몽골-투르크계 유목민들이 빈번하게 찾았고, 특히 그리스인들은 올리브유와 포도주를 팔고 곡물을 사 가기 위해 잦은 왕래를 했다. 뿐만 아니라 이 드네프르 하류와 인근 지역에는 비잔틴 제국 이전부터 그리스인들이 정착해 소위 ‘폰토스 그리스인’이라고 불리는 헬라 디아스포라 공동체가 생겨났다. 그리스인들의 이주는 19세기에 정점에 달했는데, 지금도 10만 명에 이르는 그 후손들은 주로 도네츠크 주에, 그중에서도 러시아에 결사 항전하고 있는 마리우폴에 모여 산다.
이 마리우폴 출신의 그리스계 우크라이나인 가운데 역사적으로 가장 명망 있는 인물이 풍경 화가인 아르힙 쿠인지이다. 수년 전 마리우폴에는 쿠인지 박물관이 생기는 등 시민들은 이곳 출신의 그를 갈수록 더 자랑스럽게 여기는데 그의 인기는 러시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그가 남긴 거대한 풍경화들은 지금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러시아 박물관이나 모스크바의 트레티아코프 미술관 등지에 소장되어 있다. 2018년 트레티아코프 미술관에서 마련된 쿠인지 특별전 기간 중 크림반도의 장엄한 산을 그린 그의 작품 한 점이 도난됐다가 되찾은 사건이 전 세계의 주목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러시아의 열광과 달리, 실상 그의 작품들에는 조국 우크라이나에 대한 사랑이 짙게 배어 있다.
쿠인지의 삶은 어려서부터 불우했다. 네 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고아가 된 그는 친척들에게 붙들려 있다가 건설 현장 막노동꾼으로, 빵 가게 점원 등으로 일하며 험한 삶을 헤쳐 왔다. 정규 교육을 받지 못한 그는 그러던 중에도 천부적인 재능으로 홀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며 화가로서의 꿈을 키워갔다. 이후 오데사에서 일하며 모은 돈으로 화가로서의 꿈을 이루기 위해 상트페테르부르크 예술 아카데미에 입학하게 되었고, 거기서 레핀을 비롯한 당대 러시아 최고의 화가들을 만나게 된다.
이렇게 어쩌면 되돌아보고 싶지 않은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낸 우크라이나인데도, 그가 남긴 걸작들은 한결같이 고국의 강과 언덕, 하늘을 소재로 삼고 있다. 1878년 파리 만국박람회에 출품하여 큰 주목을 받았던 ‘우크라이나의 저녁’은 언덕바지에 띄엄띄엄 자리 잡은 정겨운 오두막집들 위로 푸른 달빛이 비치고 있는데, 그 빛에 하얀 외벽이 어둠 속에서 보석처럼 빛나고 있다. 무엇보다 드네프르강이야말로 쿠인지가 가장 많이 다룬 정겨운 소재였다. 강에서 올라온 짙은 안개가 야생화가 핀 언덕을 휘감은 후 하늘에서 내려온 구름과 하나가 된 장면을 그린 ‘드네프르의 아침’, 강 너머 구름 속으로 지고 있는 붉은 태양이 강물에 잠긴 모습을 담은 ‘드네프르의 붉은 노을’, 어두운 밤하늘 짙은 구름 사이로 작고 동그란 달이 드네프르의 수면을 환히 비추고 있는 ‘드네프르의 달밤’. 어디 그뿐이랴. 잠자는 듯한 드네프르강과 짐승만 배회하는 언덕 위로 초승달의 푸른 달빛이 쏟아지는 적막하고 황량한 달밤을 그린 ‘달밤 풍경’도 있다.
이렇게 쿠인지의 많은 작품에는 고적하고 스산한 우크라이나의 달밤이 담겨 있다. 창문으로 들어온 달빛은 소싯적 외로웠던 그에게 찾아왔던 유일한 벗이었으리라. 그리고 그 달빛 쏟아지는 언덕바지의 작고 아담한 오두막집은 슬펐지만 정들었던 그의 옛집이었으리라. 강 위로 섬??한 포탄의 섬광이 난무하는 지금, 드네프르의 강과 언덕을 비추는 푸른 달빛이 그립다. 그가 화폭에 담아낸 그 쓸쓸하고 적막한 우크라이나의 달밤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