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말 예사로 들리는 영도, 고무 해녀복도 처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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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에 남은 해녀 기록들

“여~ 바위로 강 들어그냉 해삼 한 사라 잡앙왕 미역 한 줌 행 ?K 합서게.” / “다 잡아분디 강 무신.” / “또시 한 이틀 물질 안 하지 안 해서.”

지난 2일 오전 8시께 부산 영도구 동삼동 중리 앞바다. 물질을 준비하던 해녀 2명이 갯바위에서 나눈 대화다. 제주도 사투리로 잠수할 바다 방향을 의논하는 느낌이었지만, 취재진은 아무도 정확한 뜻을 이해하지 못해 서로 눈치만 봐야 했다.

제주 출신에게 해석을 부탁했다. 한 해녀가 “저쪽 바다 들어가서 해삼 한 접시 잡고 미역 한 줌 잡아”라고 말하면, 다른 해녀가 “다 잡아버린 데 가서 무슨”이라고 이견을 보였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러자 처음 말을 꺼낸 해녀가 “(그쪽에서)다시 이틀 정도 물질 안 하지 않았느냐”고 반박했다는 설명이 이어졌다.

분명 부산 영도구인데 해녀촌 일대에서 제주도 방언은 꾸준히 들렸다. 지난 8일과 23일 오전 7시께 같은 장소에서 물질을 준비한 다른 해녀들도 마찬가지였다. 지난 16일과 20일 오후 영도해녀문화전시관 1층에서 장사를 하던 해녀들의 대화도 그랬다. 영도구 동삼어촌계 고복화(86) 해녀는 “지금까지 살면서 제주말을 버리지 않고 써도 여기 사람들은 잘 알아먹어”라며 웃었다.

1880년대 제주서 건너와 물질
1962년엔 1356명 대규모 이주
상징성에 영도 제주은행은 굳건
고무 옷 개발한 보온상사도 유명
부산에 자생적 해녀 존재 기록도

■ 영도로 진출한 제주 해녀

이러한 풍경은 부산 해녀사에 제주도가 큰 축이라는 점을 방증한다. 제주도 해녀들은 일제 강점기 일본 업자에게 고용돼 영도구 등 부산·경남 일대로 향했고, 해방 이후에는 결혼이나 남편 취업 혹은 가족 이주 등을 이유로 부산에 정착했다.

제주도 해녀가 1887년 처음 육지로 진출해 물질한 곳은 ‘부산부 목도’, 부산 영도구라는 게 통설이다. 부산제주도민회에 따르면 1885년 제주도 구좌읍 출신 김완수 씨가 부산 영도구에 터전을 닦은 게 첫 부산 이주라는 기록이 있다. 해녀들 진출도 뒤따랐을 거라는 데 무게가 실린다. 1915년에는 부산·경남에만 해녀가 1700여 명에 이른 것으로 추산됐다.

1996년 제주도청 수산과 자료에 따르면 1962년에는 제주 해녀 1356명이 부산·경남으로 건너오기도 했다. 수산업협동조합법 개정으로 어촌계가 설립된 해인데 이듬해부터 10년간 해녀 증가 폭은 뚝뚝 떨어졌다. 당시 어촌계에 어장 소유권이 부여된 이후 지역민에게만 물질이 제한되면서 이후로는 이동이 준 것으로 보인다.

그동안 해녀들은 영도구와 부산 곳곳을 넘어 다른 지역까지 자리 잡은 것으로 추정된다. 기장군 신암어촌계 김정자(72) 해녀회장은 “예전에는 제주도 해녀인 어머니와 나 말고는 연화리에서 물질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며 “어머니가 제주도에 가서 해녀들을 데려오기도 했다”고 회상했다. 제주도 해녀는 물질 전수뿐만 아니라 장비 제작에 도움을 주면서 지역 해녀들과 공동체를 형성하기 시작했다.



■ 고무 옷의 시작, 유일한 은행

제주도에서 출향한 해녀에게 영도구를 포함한 부산은 특별하다. 여러 장소가 증명한다. 1995년부터 영도구를 지킨 제주은행 부산지점이 대표적이다. 금융 중심지 강남구 테헤란로에 서울지점을 제외하면, 영도구 남항동이 ‘육지’에 남은 유일한 지점이기 때문이다.

제주은행에 따르면 IMF 경제 위기 여파로 부산역 인근 부산지점은 1998년 영도지점으로 흡수됐다. 2004년 영도지점은 부산지점으로 이름을 바꿨다. 유동인구가 많은 부산역 주변 대신 영도구에 본점을 남겨둔 셈이다.

해녀를 포함해 제주도 출신이 그만큼 영도구에 많이 자리 잡았다는 점을 보여 주는 사례다. 제주은행 총무부 관계자는 “영도구는 해녀를 포함해 사업을 하는 제주도 출신이 많이 거주하는 곳”이라며 “광주 등 다른 지역 지점은 없어졌는데 영도구는 상징적 지역이라는 점도 반영해 지점을 유지하고 있다”고 말했다.

고무 해녀복이 국내 최초로 탄생한 곳도 영도구 ‘보온상사’다. 1968년부터 송숙자(83) 씨와 지금은 고인이 된 제주도 출신 남편이 함께 운영했다고 한다. 당시 일본에서 고무 원단을 수입해 잠수복을 만들었는데, 무명이나 광목천 옷을 입던 해녀에게는 그야말로 신세계였다. 방한 기능을 갖춘 고무 잠수복 덕에 추운 날씨에도 오랜 시간 물질이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현재 ‘보온씨테크’로 상호가 바뀐 업체를 운영하는 둘째 아들 고경영(52) 씨는 “부산에 고무 옷을 판다는 입소문이 퍼져 초창기에는 제주도, 경상도, 전라도 등지에서 주문이 이어졌다”며 “1980년대까지 호황이었고, 다른 지역에 기술 전수도 해 줬다”고 말했다.



■부산 토박이 해녀가 있었다?

물론 모든 부산 해녀가 제주도에 뿌리가 있다고 보긴 어려운 측면도 있다. 1801년 기장군에 유배 온 조선 후기 문인 심노숭은 에 ‘기장읍 연화리 죽도 인근에 바위가 많아 바다에서 전복을 채취하는 해부와 해녀의 이야기가 있다’고 기록했다. 해운대구 청사포 해녀들은 제주도 등 외부 해녀에게 물질을 배우지 않고, 마을에서 자생적으로 해녀가 생기거나 시집을 오면서 물질을 배운 경우가 많다는 주장도 있다.

이에 대해 유형숙 동의대 한·일해녀연구소장은 “해안가 마을에 살다 보면 자연스럽게 해산물 채취를 시도할 가능성이 크다”며 “청사포 해녀들 말처럼 부산에도 자생적인 해녀가 있다는 시각에 일리가 있다”고 말했다. 그는 다만 “제주도에서 해녀가 정착하고, 기술을 전수하면서 부산 등 육지에 해녀가 크게 늘었다”며 “그렇기에 제주도 해녀를 빼고 부산 해녀 역사를 정리하긴 어려울 것”이라고 덧붙였다. 장병진·이우영 기자 joyful@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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