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학은 사실에 기초한 일종의 진실게임”
‘역사, 라프로쉬망을 꿈꾸다’ 출간 곽차섭 부산대 명예교수
‘역사란 무엇인가.’ 부산대 곽차섭 사학과 명예교수의 신간 (푸른역사)가 다시 던지는 질문이다. 이 책은 녹록잖은 성과의 역사학자가 30년간의 지적 여정에서 골라낸 12편의 깔끔한 인문학적 글을 묶은 것이다. 지난해 정년퇴직한 그는 앞으로 10년간 연 1권씩 책을 낼 거라고 했다.
이번 책에서 다음 구절이 눈에 띈다. “역사는 우리에게 아이러니를 선물하고 우리는 그것에서 희망을 발견한다. 미래에 대한 희망의 메시지야말로 역사가가 사람들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며 동시에 역사가가 반드시 견지해야 하는 비전이 아니겠는가.” 현실적 운명의 아이러니한 부침 속에서도 희망을 전망해나가는 것이 역사라는 이 대목은 한국 대선 결과에도 적용될 듯 싶다. 우리는 지금 ‘뼈아픈 역사의 아이러니’를 목도하고 있고, 그럼에도 그것에서 또다시 희망을 발견해나가야 한다는 거다.
“과학·문학·예술과 화해 염원
역사는 신념 행위이자 투쟁
인권·소통·공존 위해 나아가야”
-‘라프로쉬망(Repprochement)’은 무슨 뜻인가.
“‘화해’라는 뜻이다. 역사학이 과학과 문학·예술의 화해를 염원한다는 것이다.”
-역사학은 문학·예술과 다른 것 아닌가.
“서양 역사 전체를 통해 역사학과 문학은 대부분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역사 서술이 문학의 일부이기를 거부한 때는 단지 19세기 랑케 이후 이른바 ‘과학적’ 역사를 추구하던 시기뿐이다. ‘사료가 같다면 똑같은 결론에 이른다’는 랑케 사학은 굉장히 편협한 것이다. 랑케가 ‘근대 역사학의 비조’이며 실증적 역사가라는 것은 20세기 초 미국 역사가들에 의해 오도된 해석이다. 랑케는 방법론으로 그런 주장을 폈지만 사실은 독일 관념주의 사관의 소유자이자 매우 인종주의적이고 서구주의적인 관점을 갖고 있었다.”
-‘있는 그대로’의 실증적·객관적 역사라는 것은 없는 것인가.
“그런 것은 없다. 역사학은 실증적이므로 객관적·과학적이라는 주장은 포스트모던 역사 개념에 의해 무너졌다. 그렇다고 역사학이 자의적인 것은 아니다. 최소한의 실증은 유지해야 한다. 그것은 의무이자 게임의 규칙이다. 역사학, 나아가 역사는 냉혹하게 말하면 사실을 가지고 하는 일종의 진실 게임이다. 누구의 해석이 더 진실에 가까운가를 결정하는 것은 얼마나 많은 동료 역사가와 대중이 그 해석을 지지하는가에 달려 있다.”
그런 자리가 라프로쉬망의 자리라는 것이다. 역사는 과학도, 문학·예술도 아니지만 그 둘의 화해를 꿈꾼다는 것이다. 이를 확대하면 인간사에서 실패와 성공은 필연적으로 교차하는데 실패를 희망으로 바꿀 수 있는 것이 역사이면서 인간의 가능성이라는 거다. 역사적 과정의 실패와 성공, 서로 다른 것, 차이의 화해가 라프로쉬망이기도 할 테다.
-그렇다면 역사란 무엇인가.
“‘역사는 현재와 과거의 대화’라는 E H 카의 정의는 정확하지 않다. 역사는 ‘현재 역사가’와 ‘과거 사실’ 간의 대화가 돼야 한다. ‘대화’란 비유도 적절치 못하다. ‘현재 역사가’는 ‘이념이나 권력’의 압력에서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에, 역사는 궁극에서는 신념 행위다. 결국 역사는 대화가 아니라 투쟁에 가깝다. ‘역사의 뮤즈 클리오(Clio)’를 가져와 저는 ‘역사는 클리오들의 투쟁’이라 말하고 싶다.”
곽 교수는 미시사를 비중 있게 말했다. 그는 “미시사는 집단이나 인물의 삶을 사회·문화적 관계망 속에서 촘촘히 그려내는 역사 서술로, 소설에 버금가는 문체와 스토리텔링의 묘미를 보여준다”고 했다. 외국 역사책으로 등을 들 수 있고, 국내서도 인문학자인 강명관 권보드래 천정환 등등의 작업을 들 수 있다고 했다.
-‘이야기 역사’라면 동아시아의 사마천 , 일연의 도 포함하는 건가.
“사마천 는 엘리트, 지배집단의 얘기 중심이다. 도 이야기 짜임새가 탄탄하지 않다. 미시사는 결국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에서 흔적 없이 사라진 민초들의 삶을 세부적으로 드러내는 역사 서술이다.”
그는 최근의 ‘지구사적 관점’ 또는 ‘동아시아 소농사회론’ 등의 틀도 결국 엘리트주의 역사관에 근거해 있는 것이라고 봤다. “앞으로의 역사 서술은 큰 중심들이 아니라 작은 중심들, 대규모의 문명이나 국가나 왕조 간의 정치적 경제적 쟁패가 아니라 소규모의 지방 혹은 지역 간의 문화적 교류, 혼종, 교차에 초점을 맞출 필요가 있다. 역사가는 어떤 시대적 방향성을 따라갈 수밖에 없다. 역사는 민주주의와 인권, 소통과 공존, 그리고 화해를 향해 나아가야 한다.”
글·사진=최학림 선임기자 theos@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