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신익의 참살이 인문학] 개미와 베짱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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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대 치의학전문대학원 교수

우리에게 이솝우화의 원저자로 잘 알려진 아이소포스는 기원전 6세기 그리스 사람이다. 본래 노예 신분이었지만 어눌하면서도 재기발랄한 입담과 재치로 주인을 도운 공을 인정받아 자유인이 되었다고 한다. 그의 이름이 붙은 수백 편의 우화에는 동물들이 많이 등장한다. 이 동물들은 당시의 사회상과 세계관과 가치관이 투영된 모습을 하고 있지만, 27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여러 맥락에서 인용되면서 다양하게 해석되기도 한다. 원저자의 의도와는 전혀 달리 해석되는 일도 드물지 않다. 개미와 베짱이 우화가 그런 경우다.

여기서는 소리 없이 일만 하는 ‘부지런한’ 개미와 시끄럽게 떠들어 대기만 하는 ‘게으른’ 베짱이가 대비되어 나타난다. 숨죽이며 일만 해야 하는 노예이며 말더듬이었던 아이소포스가 일도 안 하면서 자기의 표현에만 능한 귀족 베짱이를 원망하는 마음을 담은 이야기로 읽을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가 이 이야기를 받아들인 식민지 시기와 개발독재 시대에는 노동의 가치를 한껏 강조하고 놀이를 업신여기는 풍조가 담긴 교훈으로 읽혔다. 국민을 노동력으로 여기는 자본과 권력의 논리가 충실히 반영된 이야기다. 하지만 자본주의 종주국의 코앞에서 사회주의를 지켜 온 쿠바에서는 일밖에 모르던 개미가 노래를 통해 모두의 신명을 북돋워 준 베짱이에게 감사하고 자신을 반성한다는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되어 유통된다고 한다.


중단 없는 부지런함만이 능사는 아냐
적당한 여유가 위기극복에는 더 효율
멈춤과 비움 통해 재충전·재창조해야


그리스어 원문에는 베짱이가 아닌 매미가 주인공이었는데 이야기가 북쪽으로 전해지면서 더 흔한 곤충인 베짱이(여치)가 되었다는 뒷이야기도 있다. 우리에게 베짱이라는 말은 그 울음소리가 베를 짜는 소리와 비슷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고 그래서 베짱이는 부지런함을 상징하는 곤충이었다. 그런데 이 이야기가 전해지고 유통되면서 베짱이는 우리 조상들이 가지고 있던 이미지와는 전혀 다른 게으름뱅이가 되어 버렸다.

물론 일꾼인 개미와 게으름뱅이 베짱이라는 규정은 인간의 가치가 투영된 것일 뿐 개미와 베짱이 자신들의 삶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 일꾼 개미는 사회적 동물로서 자신이 속한 집단의 생존을 위해 먹이를 나르는 것일 뿐이며 베짱이의 노래는 생식의 확률을 높이기 위해 암컷을 유혹하는 신호일뿐이다. 그래서 생물학의 관점에서 볼 때 개미와 베짱이는 ‘생존’과 ‘생식’이라는 진화의 두 동력을 상징하는 기호일 수 있다. 일(부지런함)과 놀이(게으름)는 각각 살아남아 후손을 남기기 위해 진화한 속성이기 때문이다. 생식의 기능을 여왕개미와 수개미에게 위임한 일개미들은 더 이상 짝을 찾고 구애를 하는 시끌벅적한 퍼포먼스를 벌일 필요가 없지만, 살아남아 후손을 남기는 것이 유일한 삶의 지향인 수컷 베짱이에게 노래는 삶 그 자체의 축약일 수 있다.

최근에는 부지런함의 대명사인 일개미 집단 안에도 일은 안 하고 빈둥거리는 개체가 상당수 포함되어 있다는 연구 결과가 발표되기도 했다. 개미 속 베짱이들인 셈이다. 아직 명확한 결론이 도출된 것은 아니지만, 모든 개체가 똑같이 부지런한 집단보다는 부지런함과 게으름이 적당히 섞여 있는 집단이 예기치 않은 상황을 만났을 때 더 잘 대처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가장 부지런한 개체들을 군집에서 제거해 놓고 보면 게으름을 피우던 개체가 더 열심히 일하더라는 관찰 보고도 있다. 사람들 개개인이 일과 놀이의 균형을 맞춰 회복탄력성을 유지하듯이 개미들은 집단 전체가 그렇게 하는 것 같다.

개미 전문가이며 사회생물학의 창시자인 에드워드 윌슨은 개미를 인간과 더불어 진화적으로 가장 성공한 생물 종으로 평가한다. 남극과 북극을 제외하고 개미와 인간이 서식하지 않는 곳이 거의 없다는 사실이 그 증거란다. 그래서 그는 개미와 인간이야말로 지구의 정복자라고 말한다. 그리고 두 동물의 사회성을 진화적 성공의 주요 요인으로 꼽는다. 개미는 페로몬이라는 생물학적 활성 물질을 매개로, 인간은 고도로 진화한 신경계가 발휘하는 인지와 정서기능을 통해 개체 사이의 관계, 그리고 그 관계들의 조직인 사회를 만들고 운영한다. 이러한 관계의 사회에서는 개체들의 이익 총합이 아닌 개체들이 어울려 만들어 내는 새로운 질서와 문화가 진화적 적응이 된다. 따라서 중단 없는 전진이 아닌 멈춤과 비움을 통한 재충전과 재창조가 필요하다.

지금 우리를 빛내는 한류의 선구자들은 체제에 순응하여 부지런히 일만 해 온 개미가 아니라 때때로 멈추고 비워 자신만의 빛깔과 소리와 이야기와 풍류를 만들어 낸 베짱이들이지 않은가. 나도 곧 닥칠 정년 이후의 삶을 위해 내 속의 베짱이를 열심히 찾으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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