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준현의 사람 사는 경제] 문명과 야만
참사회경제교육연구소장
TV의 <동물의 왕국>에서 정말 생각해 보지 못한 장면을 보았다. 다리가 부러진 가젤이 스스로 사자를 찾아가 먹이가 되는 것이다. 그런 상황이 이해되기는 한다. 부러진 다리로는 먹이를 구하는 일도 쉽지 않겠지만 사나운 포식자의 공격을 받았을 때 도망가는 일은 거의 불가능할 터다. 그래서 어차피 먹이가 될 바에는 부러진 다리를 끌며 고통을 겪느니 차라리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는 것이다. 내가 놀란 이유는 그것이 본능에 따른 행동인지 깊은 고민을 거친 행동인지는 모르겠지만, 동물도 자살을 한다는 일이다. 만약 가젤이 자신의 처지를 고민한 끝에 그런 판단을 내렸다면 정말 놀랄 일이 아닌가 말이다.
위험에 처한 동료
보살펴 주는 것이 ‘문명’
장애인 단체 시위에
‘비문명적’ 비난 이준석 대표
장애인들의 불편
못 본 척하는 것은 ‘미개’
출근 시간 도시철도 역에서 시위를 벌인 장애인들을 향해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가 거친 비판을 쏟아내 논란이 되고 있다. 많은 이들이 이 대표를 비판하거나 화를 내기도 하지만 나는 굳이 그럴 마음이 없다. 유시민 작가가 다른 곳에서 한 말처럼, 도척의 개가 공자를 보고 짖는다고 해서 개의 잘못은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내가 흥미롭게 생각한 것은 이 대표가 장애인 단체의 시위를 두고 비문명적이라고 말한 대목이다. 솔직히 이 대표의 말뜻을 잘 모르겠다. 시위의 요구사항이 비문명적이라는 말인지 시위의 방식이 비문병적이라는 말인지, 장애인이 감히 시위를 한다는 일이 비문명적인지 아니면 모든 시위가 비문명적이라는 말인지 모르겠다. 아무튼 비문명적이라는 그 표현이 너무 강하게 다가와 과연 문명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20세기의 가장 유명하고 가장 영향력 큰 인류학자 가운데 한 분인 마가렛 미드 여사에게 어느 기자가 문명이란 무엇인가 하고 물은 적이 있다. 아마 기자가 기대한 대답은 문자의 사용이라든지 도시의 건설 같은 것이었을 터다. 그런데 미드 여사의 대답은 뜻밖에도 부러졌다가 다시 붙은 흔적이 있는 다리뼈였다. 스스로 사자의 먹이가 되는 가젤처럼 동물들이나 문명 이전의 인류의 먼 조상들은 다리뼈가 죽으면 고통을 참으며 죽음을 기다리든가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문명화된 인류는 다르다. 같은 공동체에 속한 누군가의 다리가 부러지면, 다시 다리뼈가 붙을 때까지 가족이든 친구든 동료든 누군가가 음식을 나눠 주고 위험으로부터 보호해 준다. 위험에 처한 동료를 도와주고 보살펴 주는 것이 바로 문명이라는 뜻이다.
장애인들의 시위 때문에 불편하다는 분들도 없지 않다. 하필이면 출퇴근 시간이냐고 항의하는 분도 더러 있는 모양이다. 왜 이분들은 이렇게 불편한 시위를 하는 것일까?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아무도 돌아봐 주지 않기 때문이다. 아무리 힘들다고 외쳐도 심지어는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호소해도 들어 주는 이들이 없으니 저렇게 불편한 시위를 하는 것이다. 이제는 곧 집권당이 될 거대 정당의 대표로부터 비난을 들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들의 시위가 효과적이라는 반증이 된다. 물론 불편하다. 1980년대 군사정권의 폭정 아래서 민주화를 요구하면서 거리로 나왔던 학생들의 시위 때문에 퇴근길이 늦어진 시민들도 불편했을 터다. 촛불 집회 때문에 지하철이 광화문역에 서지 않고 통과했을 때도 불편한 시민들이 많았을 터다. 다리가 부러진 동료에게 음식을 나눠 주고 위험으로부터 지켜 주었던 이들은 또 얼마나 불편했을까? 그러나 불편하지 않다가 아니라 불편하지만 참고 지켜 주는 것이 바로 문명이다. 문명의 반대는 무엇일까? 이준석 대표는 비문명이라고 말하지만 나는 그 뜻을 모르겠다. 마땅히 가져야 할 인간의 심성을 가지지 못한 상태를 야만이라 부르고, 심성은 가졌으나 무지해서 알지 못하는 상태를 미개라고 부른다. 내가 조금 불편하다고 다리가 부러진 동료를 사자굴에 밀어 넣는 것은 야만이고, 시자굴에 던져진 동료를 못 본 척하는 것인 미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