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세기 지식인을 통해 당대 시대 정신 엿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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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호관 이인상 연보/박희병

‘평전’은 책으로 많이 나와 있지만 ‘연보’가 책이 될 수 있을까, 평전은 하나의 입장을 취한다. 평전에 제시된 팩트는 선택된 것들이기 때문이다. 팩트의 맥을 잡은 그 입장이 대중들에게 읽히는 것이다. 이런 평전에 견줄 때 연보는 지루한 듯하지만 외려 역사에 훨씬 더 근접할 수 있다는 것이 연보학의 출발점이다. 연보가 취사 선택되기 이전의 사실들로 이뤄져, 순수학문적으로 보면 평전보다 훨씬 더 중요할 수 있다는 것이다.

추사 김정희가 극찬한 문인 이인상 연보
내면 기술 위해 편지, 산문 등 인용·소개


는 연보가 책이 된 경우다. 30년 가까이 능호관 이인상(1710~1760)에 관심을 갖고 공부하고 있는 박희병 서울대 명예교수가 썼다. 무려 580여 쪽에 이르는 연보는 무덤덤한 듯하나 그 속에 18세기 조선 시대 정신의 추이와 동아시아 역사의 추이가 내밀하게 담겨 있다. 그리고 통상 연보가 치중하는 ‘외면적 사적’뿐 아니라 ‘내면적 사적’까지 추적했다. 이인상의 내면을 충실히 기술하기 위해 편지 산문 시 등을 많이 인용하고 소개했다.

이인상은 숙종 36년에 태어나 영조 36년에 50세로 삶을 마감한 예술가이자 문학가이고, 사상인이자 지식인이었다고 한다. 그는 18세기 노론 문인의 성향을 잘 드러내는 단호(丹壺) 그룹(이윤영 송문흠 오찬 윤면동 김순택 김무택)을 대표하는 인물인데 추사 김정희가 그의 문자향과 서권기를 문인화의 최고 경지로 극찬하며 추종했다. 사후 추사를 통해 중국에까지 명성을 드날렸다고 한다. 미술사학자 이동주는 “진실로 문기를 느끼는 산수를 그렸고 심의에 가득찬 명품을 남겼다”고 이인상을 이미 평했다. 최순우 안휘준 유홍준 등 많은 미술사학자들이 그를 높이 평했다.

노론 그룹으로서 단호 그룹은 한 세대 뒤의 연암 그룹(담연 그룹)과 결을 달리했다. 정치적 지향은 비슷했으나 청나라에 대한 인식에서 후자가 수용했다면 전자는 배척했다. 이인상은 주자학을 근간으로 삼았으나 별도로 도가 사상에도 깊이 침잠했다. 또 평등의 감수성도 상당했는데 그것은 그의 아내 덕이었다. 대단한 지적 능력을 지닌 그의 아내 장씨를 그는 ‘스승으로 삼을 만한 벗’으로 여겼다. 이런 존경심으로 인해 여성에 대한 진보적 감수성을 지녔다는 것이다. 4살 아래 그의 아내는 그보다 3년 앞서 43세로 세상을 하직했다.

이인상은 명문가의 서얼이었다. 신분적 한계의 서러움 속에 그는 지적 정신적 자아를 확장해나갔던 인물이다. ‘가난하되 염치가 있고 부끄러움을 아는 것’이 그의 인간관이었다. 그는 인간이 인간다울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조건으로 ‘부끄러움’을 꼽았다.

그는 1747년 38세 때 조선통신사를 따라 부산에 온 적이 있다. 그는 노모의 걱정을 핑계로 통신사 사절을 따라 일본에는 가지 않았다. 통신사 일행을 대접하고 먹인다고 고생하는 백성들의 불만과 가여움을 적은 그의 시 ‘통도사를 출발하며’가 보인다. ‘너희 남쪽 고을 백성들 힘이 다한 게 가엾네… 오호라 나라의 기강 날로 무너져 가네’.

전근대 동아시아에서는 연보학이 있었고, 21세기 들어와 한국에서도 퇴계 허균 이규보 정약용의 연보가 나온 적이 있다. 이 책은 이런 흐름 속에서 한국 연보학의 주춧돌을 놓겠다는 큰 의욕을 품은 것이다. 박희병 지음/돌베개/586쪽/6만 원. 최학림 선임기자 the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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