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동윤의 비욘드 아크] 로컬이 곧 글로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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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상지엔지니어링건축사사무소 대표이사

‘15분 도시 부산, 시민과 함께 이상을 현실로’라는 부산시 정책발표회가 지난 3월 23일 열렸다. 이날 ‘15분 도시’ 이론을 정립한 카를로스 모레노 교수가 온라인으로 참여해 강연과 공감토크를 가졌다. 그는 부산의 15분 도시 사업의 성공을 위해서는 “신규 투자를 고민하기 전에 기존 건물을 잘 활용할 수 있는 방안을 먼저 찾아 건물 한 채를 다목적으로 사용해야 한다. 새로운 투자를 위해서는 건축, 부동산, 사업 부문 등의 민간과 협력해야 한다” 고 말했다.

15분 도시는 경제, 산업, 문화, 생활, 환경 등 모든 분야에 걸친 비전을 담고 있다. 이를 문화에 적용하면 기존 건물을 활용한 문화공간이 지역 곳곳에 있어 시민들이 언제든 쉽게 찾아가고 누릴 수 있어야 한다. 부산은 문화기반시설이 전국 17개 시도 중 최하위인 데다 생활기반시설의 노후화도 심각하다. 유명하고 그럴 듯한 것들을 유치하려는 노력도 좋지만 지역의 노후 시설 개선과 빈집, 폐교 등을 활용한 생활·문화시설을 확충해야 한다. 지역자산을 발굴하고 활용한 다양한 문화공간이 곳곳에 마련된다면 지역민의 자긍심도 한결 높아질 것이다.

지역자산은 자연적, 사회적, 문화적 특성에 따라 지역에서 경제적 가치가 있는 유·무형의 보물(재산)을 말한다. 부산지역 문화재는 부속문화재를 포함해 527건에 달한다. 등록문화재는 국보, 보물 등의 국가지정문화재와 달리 건립, 제작 시점이 대개 100년에서 50년 사이로 오래되지 않았지만, 보존·활용가치가 있는 근대유산이 주된 대상이다.

부산지역의 국가등록문화재는 현재 총 22개다. 그중 서구, 중구, 동구 등 원도심의 등록문화재가 12개로 반 이상을 차지한다. 국가등록문화재 말고 시도에서 지정하는 등록문화재도 있는데 부산시의 첫 등록문화재는 부산시 문화재위원의 심의를 거쳐 지난 1월 5일 등록을 마친 아미동 비석마을의 피란민 주거지이다. 일제강점기에 조성된 일본인 공동묘지에 한국전쟁 당시 피란민들이 판잣집을 짓고 살던 곳으로 역사적으로 뿐만 아니라 건축사적으로도 가치가 높은 곳이다.

지난해 상지건축의 인문학 아카데미는 부산문화회관이 주최한 고(故) 임응식(1912~2001) 사진전 ‘부산에서 서울로’의 인문학 강좌를 진행했다. 사진 작품 ‘구직求職’으로 유명한 선생은 부산 서구 대신동 출신으로 부민공립보통학교를 졸업했다. 1946년 부산에서 사진광화회를 창립하고, 1947년 부산예술사진연구회를 조직했다. 한국전쟁 때는 종군기자로 전쟁의 비참함을 렌즈에 담았고, 우리나라 최초로 대학에서 사진학 커리큘럼을 만들었다. 중앙대 사진학과를 출범시켰고, 1982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대규모 개인전을 연 최초의 사진작가였다.

선생은 한국 사진사에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한다. 임응식 작가의 작품 ‘정물’(1949년)은 지난해 10월 11일부터 올해 1월 30일까지 미국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뮤지엄에서 열린 ‘경계 없는 초현실주의’ 특별전에 초대됐다. 세계 최고의 미술관에 초대받은 것이다. 원제목은 ‘희구’로, 해변의 모래 위로 솟아 나온 오른손과 소라 껍데기의 조화가 그로테스크해 사진 작품이라고 보기엔 너무 비현실적이다.

필자가 작품에 대해 상세히 알고 있는 이유는 지난해 6월 발간한 인문 무크지 2호 ‘믿음’에 선생의 작품 중 골라 실은 작품이 마침 ‘희구’였기 때문이다. 서울 광화문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전시실에 들어서면 처음 만날 수 있는 작품도 선생의 것이다. 이렇듯 선생의 가치는 대한민국 역사뿐 아니라 세계에 내놓아도 손색없다. 어쩌면 선생의 고향인 부산만 그의 가치를 제대로 보지 못하는 건 아닌가 하는 섭섭함마저 든다. 지금은 서울에 짓는 걸로 결정이 난 이건희미술관과 퐁피두센터 부산 분원은 북항에 유치하겠다는 적극성을 보이면서 정작 지역의 자산을 지키고 간직하려는 데에는 박하다는 생각이다.

다행히 얼마 전 부산 서구에서는 이곳 출신인 임응식 선생의 기념관을 건립하자는 움직임이 시작됐다. 서구청장은 아미동 비석마을에 리모델링한 작은 공간을 ‘임응식 기념관’으로 하여, 차츰 지역의 자산으로 넓혀 가겠다는 의지를 내비쳤다. 뿐만 아니라 부산문화재단에서는 부산 예술의 근간을 이룬 분들을 선정해 2020년부터 ‘부산 예술인 아카이브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국제관광도시 부산을 위한 거대한 관광명소도 중요하지만 부산의 자산이 곳곳에서 문화로 피어나는 경쟁력을 무시하면 안 된다. 문화의 힘은 남의 것을 빌려 오는 데 있지 않다. 로컬이 곧 글로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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