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철의 인사이트] '산업은행 이전 반대' 민주당 생각인가?
논설위원
지난해 2월 25일. 문재인 대통령이 어업지도선을 타고 가덕신공항 예정지를 선상 시찰했다. 브리핑을 듣던 문 대통령은 “내가 관광 가이드 할게요”라며 마이크를 넘겨받아 “가덕도 연대봉 옆에 튀어나온 곳이 조선 시대 봉수대”라면서 자신의 고향 일대를 안내했다. 선실에서 문 대통령은 일행에게 “수도권 사람들이 지방의 아픔을 모른다”라고 탄식했다고 한다. 5년 만에 경남 양산 사저로 돌아올 문 대통령은 ‘지방의 아픔’을 다시 한 번 느낄 것이다. 더불어민주당이 앓고 있는 ‘인지 부조화’ 증상 때문이다.
신념과 행동의 불일치로 인한 불편한 상태, 지금까지 했던 가치 및 철학과 행동이 철저하게 부조화되는 전형적인 현실 부정을 심리학에서는 인지 부조화라고 일컫는다. 미국 심리학자 레온 페스팅거가 발표한 인지 부조화 이론은 정치판의 자기 합리화 현상을 설명하는 데도 곧잘 사용된다. 어쩌면 인간이 자신을 속이고 자기 결정을 합리화하는, 아주 바보 같은 인간의 본성이기도 하다. 최근 국책은행인 KDB산업은행과 한국수출입은행 부산 이전에 대한 민주당 일부의 반대 행보는 정치권 인지 부조화 현상의 전형이기도 하다.
문 대통령 “수도권, 지방 아픔 모른다”
5년간 공공기관 이전 거짓말로 일관
민주당 의원들 ‘이전 반대’ 기자회견
“가자 20년!” 산은 이 회장 반발 앞장
균형발전 2003년 시작된 노무현 유업
윤 당선인 산은·수은 부산 이전 공식화
삶의 터전을 옮겨야 하는 은행 직원들의 반발은 어쩌면 당연하다. 생활인으로서 ‘물설고, 낯설고, 말 설은’ 지방에 살아야 하는 두려움도 이해할 만하다. 하지만, 공공기관 이전과 국가균형발전은 민주당 당론임에도 불구하고, 상당수 민주당 국회의원들은 “산업은행 지방 이전 공약을 철회하고 원점에서 재검토하라”면서 국회 기자회견까지 열고, 이전 반대 운동을 지원하고 부추기고 있다. ‘노무현 정신’을 입버릇처럼 되뇌던 민주당 의원들의 스스로를 부정하는 듯한 이율배반적 모습은 보기 안쓰러울 정도다.
민주당은 언제부터인가 ‘노무현’ 이름 석 자만 들먹일 뿐, 그의 철학은 잃은 듯하다. 노 전 대통령은 2003년 10월 국회 연설에서 “서울과 수도권은 이미 포화상태… 인력과 기술, 산업과 자본의 집중이 한계… 서울로만 올라오던 이삿짐 보따리가 지방으로 되돌아가는 전환점을 만들어야 한다”라고 역설했다. 2개월 뒤 44석의 꼬마 여당이 국가균형발전특별법 등 지방화 3대 법률을 통과시켰다. 하지만, “노무현 정부보다 더 발전된 국가균형발전 정책을 더 강력하게 추진하겠다”던 문재인 정권에서 ‘시즌 2’ 노력은 찾기 어려웠다. 여권 좌장인 이해찬 전 민주당 대표는 “수도권의 122개 공공기관을 지방으로 추가 이전해 국가균형발전이 이뤄지도록 당이 책임지고 나서겠다”고 공언했다. 거짓말이었다. 5년 동안 수도권 집중과 지방 소멸은 더욱 심각해졌다.
그러다가, 대선에서 패배했다. 민주당은 윤석열에 진 것이 아니라, 스스로 패한 것이다. 가업 정신을 잇기 위한 고통보다는, 유산 챙기기에 집중했다. 겨우 44석으로 통과시켰던 국가균형발전법을 172석 거대 여당이 실현하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 자신의 정체성, 꿈을 잊었기 때문이다. 민주당은 ‘졌잘싸’(졌지만 잘 싸웠다)라면서 실패에 대한 성찰은 아랑곳없다. 오히려 넋 잃고 반대로 내달리고 있다.
인지 부조화 증세는 문재인 정부에서 임명된 산업은행 이동걸 회장에서 절정을 이룬다. 노무현 정부 금융감독위원회 부위원장 출신인 이 회장은 이해찬 전 대표 출판기념회에서 “절실하게 다가온 말 중 하나는 (이 전 대표의) 우리가 20년 해야 한다는 말씀이었다”면서 “가자 20년!”이란 건배사를 제창했다. 그런 그가 노무현의 꿈이었던 ‘산은 부산 이전’에 반발하고 나섰다. “(산은)지방 이전은 진보가 아니라 퇴보”라며 “(금융에 대한)이해가 부족하다”라고 반대하고 있다.
졌잘싸 망상에 빠진 민주당 172석의 뒷배를 믿거나, ‘20년 장기 집권’이란 인지 부조화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 같아 안타까울 지경이다. ‘지방시대’를 선언한 윤석열 당선인은 “기관 이기주의에서 벗어나 국가 전체의 균형 발전이라는 큰 틀에서 접근해야 한다”라면서 산업은행과 수출입은행의 부산 이전을 공식화했다. ‘노무현 시즌 2’를 보는 듯하다. 리틀 노무현으로 불리는 김두관 민주당 의원이 국책은행 본점을 지방으로 이전할 수 있는 개정안을 2018년 이후 다시 대표 발의해 체면치레했을 정도다.
‘권모술수의 대가’로 오해받는 이탈리아의 정치사상가 마키아벨리는 ‘군주론’에서 “군주가 약속을 어길 땐 정당한 이유가 있다”고 말했다. 문 대통령과 민주당이 지난 5년 국가균형발전과 공공기관 지방 이전 약속을 어기고, 대선 패배 이후 몇몇은 오히려 반대하는 ‘정당한 이유’가 무엇인가. 혹여나 ‘윤석열 정권에 반대하기 위해서’라면 낭떠러지로 달려가는 모습이 처량하다. 국민은 묻고 있다. ‘산업은행 이전 반대’가 민주당 일부의 일탈인가, 아니면 당론인가. 민주당의 소중한 꿈은 무엇인가.
이병철 논설위원 peter@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