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 10회 연속 월드컵 진출국, 실력 증명할 때
정광용 스포츠부장
얼마 전 1954년 스위스 월드컵에 출전한 우리나라 대표팀의 여정을 소개한 TV 프로그램을 봤다. 1954년 월드컵은 한국이 처음 본선에 진출한 대회다. 당시 우리나라는 한국전쟁을 막 겪은 세계 최빈국이었다. 당연히 스포츠에 대한 지원은 기대하기 힘든 실정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 대표팀은 일본과 두 차례 치른 아시아 예선에서 1승 1무(1차전 5-1, 2차전 2-2)를 기록하며 월드컵 본선 진출에 성공했다. 당초 홈 앤드 어웨이 방식으로 열려야 했던 아시아 예선은 해방 직후 반일 감정으로 인해 이승만 대통령이 일본 대표팀의 한국 입국을 불허하며 도쿄에서 1·2차전을 모두 치렀다. 원정의 불리함 속에서 한국은 일본을 완파하고 첫 월드컵 무대를 밟게 됐다.
1954년 스위스 월드컵 본선 첫 진출 후
32년간 암흑기 뚫고 36년 동안 본선행
본선에선 9번이나 조별리그 탈락 ‘쓴잔’
거센 ‘전방 압박’ 이겨내야 16강 이상 가능
하지만 스위스로 가는 여정도 험난하기 이를데 없었다. 3번의 환승 끝에 첫 경기를 불과 10시간가량 앞두고 취리히에 도착할 수 있었다. 게다가 조별리그 첫 상대는 당시 세계 최강 헝가리였다. ‘축구 전설’ 페렌츠 푸슈카스가 이끄는 헝가리에 한국은 0-9로 대패했고, 이어진 터키와의 2차전에서도 0-7로 지며 세계의 높은 벽을 실감해야 했다. 헝가리와의 9점 차 패배는 지금도 월드컵 역사상 최다 점수 차 패배 타이 기록(1974년 유고-자이르 9-0, 1982년 헝가리-엘살바도르 10-1)으로 남아 있다.
이후 한국이 월드컵 무대에 다시 등장하기까지 32년이란 긴 시간이 걸렸다. 1986년 멕시코 월드컵 때 두 번째로 본선에 오른 한국은 이후 2022년 올해 카타르 월드컵까지 10회 연속 본선 진출이란 위업을 이루게 됐다. 스위스 월드컵 이후 32년의 암흑기를 뚫고 36년간 아시아 최강 자리를 지킨 것이다.
10회 연속 월드컵 본선 진출을 달성한 나라는 한국에 앞서 단 5개국밖에 없다. 브라질(23회), 독일(19회), 이탈리아(14회), 아르헨티나(14회), 스페인(13회)이다. 이 나라들은 모두 한 차례 이상 월드컵 트로피를 들어올린 강호들이다. 이들 옆자리에 한국이 선다는 건 분명 높이 평가할 일이다. 하지만 월드컵 성적을 비교하면 아쉬울 수밖에 없다.
월드컵 본선에서 한국이 남긴 족적은 홈에서 치른 2002 한일 월드컵 ‘4강 신화’, 2010년 남아공 월드컵 첫 원정 16강 진출이 전부다. 통산 11회 본선에 올랐으나, 9번은 조별리그 탈락의 쓴잔을 맛봐야 했다.
그런 점에서 이번 카타르 무대는 한국이 의미 있는 성과를 남길 ‘기회의 땅’으로 삼아야 한다. 조금은 다행스럽게도 지난 2일 끝난 본선 조추첨에서 한국은 포르투갈, 우루과이, 가나와 H조에 묶였다. ‘죽음의 조’는 피했다는 게 전문가들의 평가다.
한국(29위)보다 국제축구연맹(FIFA) 랭킹이 앞선 포르투갈(8위), 우루과이(13위)는 브라질, 프랑스, 독일처럼 압도적으로 우세한 전력은 아니다. 가나(60위)는 FIFA 랭킹이 처지지만 우리와 비슷한 전력으로 볼 수 있다. H조에선 절대 강자도 절대 약자가 없다. 죽음의 조가 아닌 ‘혼돈의 조’인 셈이다.
H조를 두고 영국 가디언이 “가장 예측하기 어려운 조”, 폭스스포츠가 “어느 팀이든 다른 국가를 이길 수 있는 조다. 강팀도 약팀도 없다”고 분석한 건 이 때문이다.
한국이 16강 이상 성적을 내려면 남은 6개월간 어떻게 준비하느냐에 달렸다. 파울루 벤투 감독이 추구하는 ‘빌드업 축구’의 완성도를 얼마나 높이느냐가 관건이다.
요즘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EPL) 등 유럽 축구를 보면 ‘전방 압박’이 대세다. 공격수들은 상대 페널티지역 앞까지 근접해 수비수를 압박하고 공을 가로채 득점을 노린다. 상대의 압박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면 곧바로 실점 위기를 맞게 된다. 이는 이번 월드컵 아시아 최종예선 마지막 경기인 아랍에미리트(UAE)전에서 한국이 직접 당한 일이다. 한국은 아랍에미리트의 전방 압박에 몇 차례 공을 뺏기는 위기를 맞다 결국 결승 골을 내주며 지고 말았다.
벤투 감독의 빌드업 축구가 효력을 발휘하려면 전방 압박을 이겨내야 한다. 이를 위해선 선수들의 볼 키핑력, 즉 공 간수능력과 빠른 공 처리, 정확한 패스능력이 필수다. 한 박자 빠른 공 처리와 정확한 패스로 상대의 틈새를 노려 빠른 역습을 가해야 승산이 있다. 더구나 본선 진출국들은 아랍에미리트보다 수준이 높아 더욱 정밀한 축구가 요구된다.
몇 년 전 이영표 현 강원FC 대표가 “월드컵은 경험하는 자리가 아니라 증명하는 자리”라 한 말이 회자된 적이 있다. 10회 연속 월드컵 본선 진출국다운 실력을 증명해야 할 시간이 머지않았다. kyjeong@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