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벌이는 러시아 싫어”… 젊은 엘리트 30만 명 ‘엑소더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이후 러시아에서 수십만 명의 젊은 엘리트층이 고국을 떠났다고 월스트리트저널(WSJ)이 10일(현지시간) 보도했다. 젊은 인재 탈출이 가속화되면서 가뜩이나 서방의 제재로 힘들어진 경제를 더욱 위협하고 있다고 WSJ는 분석했다.
사람들의 출국을 돕는 러시아 비영리단체 ‘오케이 러시안즈’는 2월 말 전쟁이 시작된 이후 약 30만 명의 전문직 종사자가 출국했다고 추산했다. 이들은 주로 IT(정보기술) 전문가, 과학자, 금융과 의료 종사자로 조지아, 아르메니아, 터키 등지로 향했다고 WSJ는 전했다.
IT·과학·금융 등 고학력 인재들
조지아·아르메니아·터키행
푸틴 온갖 당근에도 이민 택해
오케이 러시안즈에 따르면, 러시아를 떠난 사람들의 평균 연령은 32세이고 80%가 고등교육을 받은 것으로 나타났다. 그들은 고국을 떠난 이유로 전쟁 반대, 탄압에 대한 두려움, 비관적 경제 전망을 꼽았다.
문제는 이들이 러시아 경제를 이끄는 핵심 인력이라는 점이다. 국제금융연구소(IIF) 엘리나 리바코바 부수석 경제학자는 “러시아에서 출국했거나 출국을 계획 중인 이들은 대개 교육 수준이 높고 젊은 세대”라면서 “가장 생산성이 높은 노동력이 사라지는 셈”이라고 말했다.
러시아에서 최근 급부상한 분야인 IT 산업에서만 전쟁 후 지난달 말까지 5만∼7만 명이 고국을 등진 것으로 집계됐고, 이달 중에는 10만 명이 추가로 떠날 것으로 예상된다. 이와 관련,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지난달 26일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한 연설에서 "짧은 시간에 일어난 놀라운 두뇌 유출"이라고 말했다.
최근까지도 러시아 정부는 전문직 종사자들의 유출을 막기 위해 안간힘을 써왔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지난달 IT 분야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징집을 면제하는 법령에 서명했다. 또한 러시아 정부는 세금 감면과 저리 대출, 우대 주택담보대출 등으로 이들을 붙잡으려 했다.
그럼에도 이들의 엑소더스(대탈출)는 더욱 가속화되고 있다. 유치원생 수학 공부 앱을 공동 개발한 사샤 카질로는 얼마 전 가족과 함께 러시아를 떠나 파리로 향했는데, 앱 개발자 15명가량을 포함해 사업체도 이전할 계획이다. 그는 남편이 전쟁 반대 목소리를 내다 13일간 구금된 것이 출국에 결정적 영향을 줬다고 WSJ에 말했다.
러시아 IT 기업인 얀덱스에서는 최고경영자(CEO) 엘레나 부니나가 임기 만료를 2주 앞두고 조기 사임하면서 “이웃과 전쟁을 벌이는 나라에서 살 수 없다”고 사내 공개 메시지를 띄웠다. 이어 프로그래머를 포함해 수십 명의 얀덱스 직원이 러시아를 떠났다고 전했다.
러시아에서 이같은 규모의 엑소더스가 벌어진 것은 1917년 공산주의 혁명 당시 고등 교육 중산층과 고위층 등 수백만 명이 러시아를 떠난 이후로는 처음이 될 수 있다고 러시아 전문가들은 분석했다.
시카고대 교수인 콘스탄틴 소닌은 “초기 엑소더스가 불과 몇주 사이에 일어났다”면서 “100년 넘게 러시아에서 이처럼 집중적으로 이민자 물결이 일어난 것을 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이현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