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광명의 정견만리(正見萬理)] 장관은 임명하면서 부처는 폐지?
논설위원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이 지난 10일 여성가족부(여가부) 장관 후보자로 김현숙(56) 숭실대 교수를 지명했다. 여가부는 윤 당선인이 폐지를 공약한 부처다. 그런데도 그 수장을 낙점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을 연출한 것이다. 여가부 폐지 공약은 철회된 것인가.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권성동 국민의힘 원내대표는 같은 날 “당선인이 여러 차례 약속한 거라 폐지 수순을 밟는 것은 명확하다”고 밝혔다. 장관으로 김 교수를 내정한 것도 그 수순으로 읽힌다. 경제학자인 김 교수는 지난달 인수위에서 정책특보를 맡으면서 사실상 여가부 폐지를 주도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장관 후보자 선임 직후 “미래를 열 수 있는 새로운 부처로 갈 수 있도록 충분히 의견을 수렴하겠다”고 말했다. 스스로 여가부 폐지를 공식화한 셈이다.
여가부 폐지 공약 윤석열 당선인
장관 후보자로 김현숙 교수 낙점
공약 철회는 아닌 것으로 보여
“올 지방선거 의식” 등 여러 분석
폐지 명분 절실한지 비판 제기
차별에 대한 근본적 고민 있어야
폐지될 부처의 장관 임명?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김 후보자가 공식 장관이 되기 위해선 국회 청문회를 거쳐야 한다. 청문회를 통과해도 그의 임무는 한시적이다. 윤 당선인 취임 이후 조직 개편을 통해 여가부가 폐지되면 그는 곧바로 그만둬야 한다. 여가부를 대체하는 새 부처를 김 후보자에게 맡긴다 해도 다시 청문회를 거쳐야 한다. 이 무슨 낭비인가. 불과 몇 개월 사이 이뤄지는 조직 개편에 드는 비용도 만만치 않을 것이다.
윤 당선인과 인수위가 이번 조각에서 여가부를 존치키로 한 데에는 여러 가지 분석이 나온다. 인수위는 여가부 포함 현 정부 체계를 기반으로 하는 조직 개편에 대해 외교·안보를 이유의 하나로 들었는데, 대통령 집무실 이전 문제의 경우 안보 공백이라는 여론의 질타에도 강행한 점에 비추어 보면 공감하기 어렵다.
분석의 하나는 여소야대로 형성될 향후 정국에 따른 어쩔 수 없는 고육책이라는 설명이다. 정부 부처를 새로 구성하려면 정부조직법을 바꿔야 한다. 그런데 172석이라는 압도적 의석 수를 갖고 있는 더불어민주당이 여가부 폐지에 부정적이다. 110석의 국민의힘이 밀어붙인다 해서 간단히 해결될 일이 아니다. 그래서 일단 여가부를 포함한 현 정부조직법대로 정부를 출범시키고 후일을 도모하자는 쪽으로 입장을 정리했을 수 있다.
이 경우 윤 당선인과 국민의힘이 주장해 온 여가부 폐지의 명분이 그다지 절실하지 않음을 스스로 인정한 건 아닌지 의문을 갖게 된다. 새 정부가 나라와 국민의 운명에 지대한 영향을 미칠 것이라 진단한 정책이라면 난관이 예상되더라도 에두르지 않고 관철시키려 노력하는 게 바람직하다. ‘2보 전진을 위한 1보 후퇴’라는 식의 태도는 정당하지 않다. 명분이 확실하다면 아무리 다수 의석을 가진 야당이라도 무작정 반대하기는 어려운 법이다.
또 다른 설명은 오는 6월 1일 치러지는 지방선거 때문이라는 것이다. 여성 유권자의 표를 의식했다는 이야기다. 지난 20대 대선에서 윤 당선인의 20대 여성 득표율은 33.8%에 그쳤다. 그에 비해 이재명 후보는 58%의 지지를 받았다. 30대 여성에서도 49.7% 대 43.8%로 이재명 후보 지지세가 강했다. 윤 당선인과 국민의힘으로서는 이 부분이 신경이 쓰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대선 승리에 취해 여가부 폐지를 강행할 경우 올 지방선거에 악영향을 끼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요컨대 지방선거를 노린 전략적 꼼수라는 지적이다. 국가 운영의 근간이 되는 정부 조직을 선거에서의 이익을 위한 수단으로 삼는 게 온당하냐는 비판이 그래서 나온다.
어느 경우든 결과적으로 폐지될 정부 조직의 장관을 뽑아서 부처 폐지 업무를 맡기는 기묘한 상황을 맞게 됐다. 이와 관련해 보다 근본적 질문을 던져야 할 지점이 있다. 우리 정부 조직에서 여가부는 숱한 우여곡절 끝에 탄생한 부처다. 김대중 정부 시절인 2001년 여성부로 시작해 정권이 바뀔 때마다 축소 또는 폐지 논란에 휩쓸렸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도 여성 인권 향상, 직접적으로는 남녀 차별 금지라는 기치를 내세우며 존속했다. 여성계(여성단체들)가 여가부를 “수십 년 공들여 쌓은 탑”으로 표현하는 이유다. 이런 저간의 사정이 있는데도 윤 당선인은 지난 1월 7일 자신의 SNS에 ‘여성가족부 폐지’라는 단 7글자의 공약을 느닷없이 선포했다. 뚜렷한 근거나 대안 제시는 없었다.
여가부 폐지를 주장하는 측은 “현재 우리 사회에 구조적 남녀 차별은 없다”고 한다. 하지만 정작 여성계는 “지금도 차별받고 있다”고 호소한다. 이 간극을 어떻게 해소할 것인가, 그에 대한 깊은 고민은 있었는가 묻게 되는 것이다. 폐지를 기정 사실화한 부처에 새 장관을 임명하는 촌극은, 더구나 그것이 선거를 의식해 눈 가리고 아웅하는 것이라면 국민 기만에 다름 아니다. 정직한 답이 있기를 바란다. kmyim@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