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코드 부산] ④ 어린 날의 희로애락이 담긴, 추억의 영화관
*‘레코드 부산’은 사라진 부산 추억의 장소를 독자들의 사연과 <부산일보> 소장 사진·기사로 풀어내는 코너입니다.
부산은 ‘영화의 도시’라 불리죠. 개항 이후 일본과 가까웠던 부산에는 일찍이 극장이 생겨나기 시작하는데요. 광복 이후 부산 중구 남포동을 중심으로 극장가가 생겨나고, 서면 일대에도 극장들이 하나둘씩 들어섰습니다. 이후엔 동네마다 크고 작은 극장들이 하나씩 생겨났죠.
즐길만한 거리가 영화밖에 없던 시절, 부산 시민들은 영화를 보며 지친 삶을 달래곤 했는데요. 주말이면 데이트하는 연인들 뿐 아니라 자녀들 손 잡고 온 가족들로 영화관은 발 디딜 틈 없이 북적였습니다. 일렬로 다닥다닥 붙은 좌석에 꼭 붙어 앉아 눈앞의 대형 스크린에 시선을 빼앗겼던 그 시절, 부산 극장에 담긴 독자들의 추억을 훑어봤습니다.
■ 그때 그 시절
#북성영화극장
서면 로터리 바로 옆 서면 한 가운데 북성극장이 있었죠. 어릴 적 아버지 손잡고 서부영화나 중국 무협 ‘외팔이 시리즈’, ‘007 시리즈’를 보러 다닌 추억이 생생합니다. 그 당시 북성극장은 입석도 들어가기 힘들 정도로 성황리에 성업 중이었는데요. 어느 명절날 아버지 손을 놓쳐 울다가 영화 도중에 방송을 해서 아버지와 상봉했던 추억도 있습니다. 그리고 영화 시작 전 슬라이드 필름으로 광고가 나왔었는데 허바허바사장, 당코리테일러, 이명래고약 등의 광고도 그립고, 상영이 끝난 막간에 울려나오던 벤처스 음악들도 그립습니다. / 부산 부산진구 61세 배병*
#은아극장
어릴 때 태화백화점 옆 은아극장에서 아저씨 두 분이 페인트 붓으로 간판을 직접 그리고 색칠하셨어요. 어느 순간 일반 간판으로 바뀌면서 그분들은 그 뒤로 어떻게 되셨는지 궁금하네요. 92년도 국민 학생일 때는 영화비 하나를 결제하면 두 영화를 볼 수 있었어요. 그때 우뢰맨이랑 다른 영화도 같이 본 기억이 나네요. 애들 영화는 영화관에서 목욕탕 의자에 앉아 본 기억이 나요. 문화생활 즐길 거라곤 어린이대공원, 금강공원밖에 없어서 영화관이 인기가 있었던 것 같아요. 영화관 매표소 아래에 쪽자, 오락기도 있었던 기억이 나네요./ 부산 동구 43세 노진희
■ 부산 극장의 역사
홍영철 한국영화자료연구원장이 쓴 ‘부산극장사’에 따르면, 부산에는 해방 이전 23개의 극장이 있었습니다. 첫 극장으로 알려진 '행좌(남포동)'부터 시작해 '송정좌(남포동)', '부산좌(부평동)', '국제관(중앙동)', '태평관(창선동)', '소화관(창선동)', '동래극장(수안동)', '부산극장(남포동)'등이 문을 열었습니다. 하지만 시대가 시대인지라, 23곳 중 부산 사람의 자본으로 운영되는 극장은 한 곳도 없었습니다. 또 오늘날처럼 서구형 극장건축양식이 아닌 전통 일본식 극장의 형식으로 지어졌죠.그래서 극장 이름에도 일본식인 ‘좌’나 ‘관’이 붙었습니다.
초창기 극장은 대부분 연극 전용극장이었습니다. 실사나 희극 등의 활동사진을 상영하는 곳도 있었는데, 이 역시 상영시간이 10분 내외로 짧은 영화가 대부분이었습니다. 점차 '발성영화(화면과 함께 소리가 나오는 영화)'가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간혹 일부 극장에서 '발성영화(화면과 함께 소리가 나오는 영화)'를 상영하기도 했지만, 보편적이진 않았죠.
이런 부산에 1947년, 순수 부산 자본으로 세워진 첫 영화관이 등장합니다. 서면 로터리에 세워진 '북성영화극장'입니다. 대규모는 아니었지만, 이전까지 대중문화 공간이 한 곳도 없던 서면 주민들에겐 큰 선물이었습니다.
북성영화극장이 생긴 이후 1950년 문화극장, 1955년 현대극장, 1957년 대영극장·제일극장, 1961년 동명극장·왕자극장 등이 생기면서 남포동에 극장가가 형성됩니다. 서면 일대에도 영화관이 하나둘씩 생겨납니다. 1957년 동보극장, 1962년 태화극장, 1970년 대한극장 등이 잇따라 문을 열었습니다. 이로써 부산의 극장 지형은 크게는 중구 남포동과 부산진구 서면 일대로 나뉘게 됩니다.
그 외의 지역에서도 영화관은 생겨나고 없어지고를 반복합니다. 범일동에는 삼성극장(1959), 삼일극장(1966), 보림극장(1968)이 이름을 날렸고, 동래에서는 동성극장(1969), 온천극장, 초량에도 수정극장(1957), 초량극장(1958), 천보극장(1960) 등이 생겨났죠.
부산 극장가는 1960년대, 전성기를 맞이합니다. 당시 미국 서부영화와 '007 시리즈'가 개봉하면서 극장마다 북새통을 이뤘습니다. 1969년 연간 영화를 감상하는 횟수가 1인당 13.86회였다고 하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극장을 찾았을지 예상이 되죠?
호황을 누리던 극장가는 1970년대부터 조금씩 침체하기 시작합니다. 특히 가정에 TV가 보급되면서 극장을 찾는 발길도 줄어듭니다. 유신정권의 검열로 인해 침체 속도는 더욱 빨라졌고, 문을 닫는 극장도 속출했습니다. 이 시기에 문화극장, 북성극장, 현대극장 등도 문을 닫았죠.
1980년대는 프로야구가 개막합니다. 그 외에도 레저활동 등 여가생활을 즐기는 인구가 많아졌죠. 영화 외에도 다양한 선택지가 많아졌으니, 영화에 관심이 소홀해진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처사였겠죠. 대신 이 시기엔 좌석이 120~150석 정도로 작은 소극장이 하나둘씩 생겨납니다. 부산에는 1983년 동아데파트에 ‘대아극장(이후 동아극장)’이 처음 문을 열면서 부산에 48곳의 소극장이 생겨납니다. 소극장 붐으로 극장가가 활기를 되찾나 싶었지만, 오히려 여러 곳에 난립하다 보니 1990년대 들어서는 하나둘씩 문을 닫고 맙니다.
1993년부터는 복합영화관 시대가 도래합니다. 부산극장이 처음으로 3개의 관을 갖춘 복합영화관을 도입하는데요. 이전까지는 한 영화관에 1개관만 있는 단관 시대였습니다. 1999년 대영시네마, 2000년 씨네시티 부산 등이 문을 열었고, CGV, 롯데시네마, 메가박스 등의 브랜드들도 2000년부터 각 지역에 하나둘씩 생겨납니다.
2000년 중·후반부터는 대기업이 운영하는 영화관이 우후죽순 들어서면서, 향토 극장들은 아예 문을 닫거나 대기업 자본에 흡수됩니다. 부산극장사를 얘기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부산극장도 현재는 '메가박스 부산'이 됐죠. 남포동 BIFF광장의 상징이던 '대영시네마'도 문을 닫고, 현재는 '롯데시네마 대영'이란 이름으로 명맥만 유지하고 있습니다.
■그때 그 사람
컴퓨터 그래픽이 보편화되기 전, 각 극장 외벽엔 상영작을 알리는 그림 간판이 내걸렸습니다. 극장엔 간판을 그리는 미술부 직원들이 있었는데요. 취재진은 부산의 마지막 극장간판 미술가, 권오경 씨를 만났습니다.
권 씨는 1980년, 극장과 처음으로 인연을 맺었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던 권 씨는 고등학생 때 미술부 활동도 하는 등 미술에 대한 열정이 가득했습니다. 하지만 가정 형편상 대학에 진학하진 못했습니다. 군 제대 후 그림을 더 배우고 싶은 마음에 무작정 찾은 곳이 당시 남포동에 있던 ‘왕자극장’이었습니다.
당시 왕자극장은 소위 ‘이류’ 극장이었습니다. 개봉작을 상영하는 ‘개봉관’은 아니었고, 개봉관의 상영이 끝난 작품을 이어받아 상영하는 곳이었죠. 그래도 영화관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이곳에서 밑그림부터 그려가며 그림을 배웠습니다.
왕자극장에서 경험을 쌓은 권 씨는 개봉관인 제일극장으로 자리를 옮겼고, 그림 그리는 친구들과 함께 삼일‧삼성극장과 소극장 등 7곳을 돌면서 그림을 그리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부산극장 미술부장으로 자리를 옮기게 됐습니다.
영화 간판의 구성과 디자인은 온전히 미술부장의 몫입니다. 작은 사이즈로 그릴 수도 있고, 건물 높이만큼 큰 간판을 그릴 수도 있습니다. 권 씨가 작업한 가장 큰 간판은 영화 ‘호걸춘풍’이었는데요. 영화배우 이대근 씨가 한복 입고 춤추는 모습을 극장 바닥에서 옥상 높이로 그렸다고 합니다. 15~17m 정도 됐다죠. 이런 대형 간판들은 눈 따로, 입 따로 조각조각 따로 그린 뒤에 설치할 때 퍼즐 맞추듯 맞춘다고 하는데요. 그릴 당시에는 ‘이게 잘되고 있는 건가’ 감이 안 오는데, 설치해 놓고 멀리서 보면 배우 얼굴을 닮아있다고 합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은 ‘지옥의 묵시록’입니다. 이 그림을 그렸을 때, 극장 사람들뿐 아니라 다른 동료들도 “그림이 좋다. 예술성 있다”면서 치켜세워 줬다고 하네요.
서울과 부산의 극장들은 그림체도 달랐다는데요. 서울의 극장 그림은 실제 사진처럼 매끈하게 그리는 게 특징이라면, 부산의 극장 그림은 ‘그림답게’ 거친 붓 터치를 한다고 합니다. 특히 액션 영화일 때는 거칠게 표현하면 훨씬 힘 있고 입체적으로 표현이 가능했다고 하네요.
“요즘에야 매스컴으로 광고하지만 그 시절엔 광고가 될 만한 게 간판밖에 없잖아요. 그러니까 영화사에서도 토 다는 것 없이 다 지원해줬죠. 극장마다 간판 경쟁도 치열했죠. 맞은편 극장에서는 터미네이터 눈에 불도 들어오게 하더라고요. 재밌는 시절이었죠.”
2000년대 들어서는 극장가의 흐름이 바뀌었습니다. 필름 영화가 디지털 영화가 되고, 컴퓨터 그래픽이 보편화되면서 더 이상 그림간판이 필요하지 않은 시절이 됐죠. 이미 주변 극장에서는 그림 간판을 떼고, 사진 간판을 붙이던 때였습니다. “예상은 했죠. 주변에선 점점 없어지고 있었는데 부산극장 사장님이 그림을 좋아하셔서 우리는 다른 데보다 1~2년 정도 늦게 뗐죠. 시대가 변하면서 없어진 직업이 된 셈이죠.”
2003년, 극장 그림 간판 시대가 막을 내리면서 극장을 떠났지만 아직 붓은 놓지 않았습니다. 권 씨는 극장을 그만둔 후로 인테리어 디자인 사업을 하고 있는데요. 현장 상황에 여유가 생기면, 틈날 때마다 순수 미술 작업을 계속 이어가고 있습니다.
“시너 냄새로 ‘두통’이란 직업병이 따라다녔지만, 원 없이 그림을 그릴 수 있어 참 재밌었죠. 어떻게 그리면 좋을지 커피숍에 앉아서 치열하게 고민도 했고요. 좋아하는 일을 할 수 있도록 잘 가르쳐주셨던 제 스승님, 유용부 부장님을 비롯한 선배들에게 감사함을 전하고 싶습니다.”
*‘무아’, ‘랩소디’, ‘별들의 고향’, ‘필하모니’, ‘마술피리’ 등 이제는 사라진 부산의 음악감상실·음악다방에 담긴 독자 분들의 추억을 들려주세요. 인스타그램‧페이스북 ‘부산일보’ 계정 관련 게시글에 댓글 남겨 주시거나 메시지를 보내주시면 됩니다. yool@busan.com 메일함도 열려 있습니다.
글=서유리 기자
일러스트=이지민 에디터
서유리 기자 yool@busan.com , 이지민 에디터 mingmini@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