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하고 의로운 사람 돕고 창의적 연구에 보탬 되고 싶어”
‘해외교포 사목의 전설’ 왕영수 신부
2020년 어느 날 아흔을 바라보는 한 성직자가 “내 전 재산을 줄 테니 수도단체든, 수녀님이든 다 가져가라”고 깜짝 선언했다. 그가 설립한 종교공동체의 경제적 가치는 100억~150억 원대. 한데 1년이 가도록 아무도 나서는 이가 없었다. “요새 신부 되고, 수녀 되는 사람이 없더라. 수도원을 운영하고 싶은 사람이 드문 거야….”
모교 김천 성의중·고교 장학재단 설립
새예루살렘공동체 등 전 재산 기부
물질만능주의 사회에 숨통이 되길
‘무엇을 남길까, 아니 무엇을 나눌까.’ 고심하던 차에 언뜻 모교가 떠올랐다. ‘아버지 신부’인 김수환 추기경을 처음 만난 학교, 그리고 자신이 사제의 꿈을 꾸었던 그곳. 그는 결국 전 재산을 모교의 장학재단 설립에 기부하기로 결심했다. ‘해외교포 사목의 전설적 신부’로 불리는 왕영수(86·프란치스코 하비에르·부산교구) 신부의 이야기다. 새예루살렘공동체(울산 울주군 서생면)의 원장인 왕 신부를 지난 16일 공동체공간 사제관에서 만났다.
새예루살렘공동체는 신자와 일반인을 위한 쉼터이자 피정(避靜)의 집이다. 왕 신부가 2006년 은퇴하면서 건립했다. 왕 신부는 올해 초 새예루살렘공동체를 모교인 경북 김천 성의중·고등학교에 기부하기로 했다. 지난해 9월 학교를 찾았다가 ‘70년 역사에도 변변한 장학재단이 없다’는 말에 한층 마음이 쓰였다. 그는 숙고 끝에 새해가 되자 학교에 장학재단 설립을 약속, 2월에는 아예 새예루살렘공동체를 포함해 전 재산을 내놓겠다고 밝혔다. 학교의 수십 년 숙원이 왕 신부의 이 한마디로 돌파구를 찾는 순간이었다.
새예루살렘공동체는 “교회에 봉사하는 이들이 늙고 아파 갈 곳 없을 때 휴식처로 제공하고자” 조성한 곳이다. 1991년 농막이나 지으려 산 땅이 우연히 김대중 정부 들어 그린벨트에서 풀리고 도시구획정리를 거치자 땅값이 10~15배까지 뛰었다. 왕 신부는 “(당시) ‘이래서 사람들이 부동산 투기를 하는구나’ 싶었다. 선한 의도가 깃든 땅이어서 하느님이 도와주셨겠지(웃음)”라고 말했다.
학교와 동창회는 지난 4월 ‘재단법인 성의장학회’란 명칭으로 교육청 인가를 받았다. 새예루살렘공동체는 오는 6월께 감정을 거쳐 장학재단에 귀속할 예정이다.
왕 신부는 전 재산을 내놓자 “대단한 환희를 느꼈다”고 했다. “주는 것이 이렇게 많은 것을 소유하는 방법이구나.” 다시 한번 깨달았다는 것이다. 1978~79년 장기간 해외사목을 다니며 모아둔 3만 달러를 가난한 학자와 대학생에게 나눠주면서 처음 느꼈던 해방감, 그때가 생각났다.
마음에 고난도 찾아왔다. 왕 신부는 “자긍심과 자부심이 오히려 나를 괴롭혔다. 원래 내 것이 아닌데 스스로 오만해졌나 걱정이 들었다. (나는) 그저 관리인에 불과한데…주인 행세를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고 토로했다.
천주교 집안에서 자란 그는 교장과 아버지의 권유로 성의중에 입학해 6년간 장학금을 받으며 고등학교까지 다녔다. “그저 얌전하고 공부만 할 줄 알았던 학생”이었다. 고교 3학년 때 교장 선생님이던 김수환 추기경과의 추억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신학교에 갈 때 추천서를 써 준 이도 부산교구 황금동 성당의 당시 본당 사제인 김수환 추기경이었다. 왕 신부는 “평생 나눔과 사랑을 실천한 김수환 추기경님을 생각하면…(장학재단 설립은) 아무것도 아니다”고 했다.
그는 성의장학회 초대 이사장을 맡았다. 한사코 고사하다가 “장학회의 기본 원칙만 심고 떠나겠다”고 했다. 왕 신부는 “장학회가 출범하면 선한 일, 창의적인 연구, 의로운 행동을 하는 이들이 금전 문제로 어려울 때 적극 돕고 싶다”며 “넓게는 장학회를 통해 물질만능주의 사회에 숨통을 틔우는 이니셔티브를 줄 수 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성의장학회는 오는 24일 성의고등학교 양심관 3층에서 창립총회를 개최한다.
글·사진=권승혁 기자 gsh0905@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