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 드라마 '파친코'와 부산 엑스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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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열 경제부 차장

10여년 전 일본 후쿠오카에서 일할 때였다. 재일교포 2, 3세들이랑 종종 어울렸다. 한 재일교포는 술에 취해 이런 말을 했다. 나보다 대여섯 살 어렸던 것으로 기억한다. "과거 일본에서 자이니치(在日, 재일교포를 일컫는 말)가 할 수 있는 일은 고작 세 가지였다. 돈이 있으면 파친코점을 경영하고, 아니면 자이니치의 신용금고에 취직한다. 그것도 아니라면 건달(야쿠자)이 될 수밖에 없다." 파친코, 가장 왜색적인 단어처럼 들리지만, 사실은 일본사회에 섞일 수 없었던 재일교포를 상징하는 단어다.

애플TV+ 오리지널 시리즈 '파친코'가 전 세계에서 화제다. 드라마는 일제강점기인 1930년대 초반 부산에서 오사카로 건너간 '선자'라는 여성의 일생과 그 가족들의 이야기를 통해 식민지배 하 조선인과 해방 후에도 나아질 것 없었던 재일교포의 삶을 조명한다. 7살 때 뉴욕에 이민한 재미동포 1.5세 이민진 작가의 동명소설을 원작으로, 미국 자본이 만들었다. 현재 시즌1을 공개 중이며 시즌4까지 예정됐다고 한다.

부산 출신 재일교포 삶 다룬 서사시
세계적 흥행에 ‘부산’ 인지도도 상승
작품 속 부산 스토리에 세계인 공감
엑스포 유치전에서 적극 활용해야

유튜브에 무료로 공개된 드라마 1화의 조회수만 무려 1000만 뷰를 넘었다. 1화 공개 후 뉴욕타임스, 뉴스위크, BBC 등 해외 언론의 찬사가 쏟아졌다. 그중 하나만 인용해보자. "올해의 위대한 드라마가 아니라 지난 몇 년 중 최고"(영국 글로브앤드메일). 한국이 만든 드라마는 아니지만, 괜히 어깨가 으쓱해진다.

경제부 기자가 웬 드라마 리뷰냐, 물으실 수 있겠다. 사실 '파친코'의 흥행이 반가운 데에는 또 하나의 이유가 있다. '파친코'의 성공이 부산이라는 도시를 전세계에 알리는 부수효과를 낳고 있다는 점이다. 굉장한 경제효과다. 2030년 엑스포를 유치하려는 부산으로선 더욱 고맙다. 부산은 '파친코'의 주요 배경 중 한 곳이다. 여태껏 슈퍼히어로가 광안대교 위를 날아다니는 짧은 장면 정도를 삽입한 글로벌 빅히트작은 더러 있었지만, 부산 그 자체가 극 스토리를 이끄는 중요공간으로 장치한 작품은 처음이다.

사실 세계인들에게 부산이라는 도시의 인지도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높지 않다. 아시아에선 꽤나 유명할지 몰라도, 대륙을 건너고 대양을 건너면 상황은 역전된다. 그네들 공항 국제선 노선표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는 부산이라는 생경한 이름을 아는 편이 오히려 놀랍다. K팝, K드라마에 열광해 한국을 배우는 세계의 젊은이들에게서조차, 한국을 아는 것과 부산을 아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다. 현실은 냉정하고, ‘팩폭’(팩트 폭격)은 언제나 쓰리다. 그러나 ‘파친코’ 이후로 세계의 많은 시청자들은 매주 1시간씩(혹자는 몰아서) 부산이라는 도시 브랜드를 머릿속에 각인한다. 부산이라는 이름이 전 세계에서 이처럼 뜨겁게 소비된 적은, 단언컨대 지금껏 없었다.

허나 ‘파친코’ 성공의 부수효과에만 만족하기엔 이번 기회가 너무 아깝다. 물 들어왔을 때 노 저으란 말이 다소 비속하게 들리기도 하겠지만, 그것만큼 직관적인 경제적 교훈도 드물다. 사이버 외교사절단 반크는 이미 ‘파친코’를 활용해 일본의 한국 역사 왜곡 사례를 세계에 알리는 캠페인을 벌이기로 했다고 한다. 발 빠르다. 부산도 이참에 어떻게 하면 ‘파친코’의 성공을 엑스포 유치에 이용할 수 있을지 고민해야 한다.

‘파친코’의 서사는 부산을 먼저 산 선배들의 이야기이다. 가장 한국적인, 부산적인 이야기에 세계가 공감한다. 늙은 선자(윤여정 분)가 50여 년 만에 돌아온 부산 앞바다에서 오열을 터뜨리는 장면(4화)은 가장 한국적이며 또한 세계적이다. 식민지배의 상처는, 꾹꾹 눌러 참아 온 한국인의 한(恨)으로 굳이 설명하지 않더라도, 전 세계가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보편적 기억이다. 국제박람회기구(BIE) 170개 회원국 대부분이 과거 지배 혹은 피지배의 역사를 갖고 있다. 그들은 역사의 상처를 아파하고, 혹은 반성하고, 보다 나은 미래를 꿈꾼다.

“고마 집(오사카)에 가자. 다음에 또 오면 되지. 인자는 그랄 수 있을 것 같다”(6화). 아픈 과거를 잊고자 애써 회피하기만 하던 늙은 선자는 돌아온 부산에서 비로소 과거를 온전히 그대로 직시하고, 극복한다. 부산이 엑스포 유치전 속에서 치유와 화해, 극복과 미래를 이야기할 수 있다면 BIE 회원국들로부터 큰 공감을 이끌어 낼 수 있을 테다. 마치 ‘파친코’ 속 선자의 부산이 그랬던 것처럼. 그리고 회원국들은 2030년 부산 북항에서 다시 한번 부산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할 테다. bell10@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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