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움은 어른들에게 맡겨 둬… 너는 우리 곁에서 쉬고 놀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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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민 어린이 돌보는 폴란드 유치원 교사 그라지나 슈브리친스카르 기고문

지난 13일 자 <부산일보> 2면 전체에 우크라이나의 시인 페트로 팔리보다 씨의 ‘내 눈으로 직접 본 전쟁’ 기고문이 실렸다. 이 기사를 인터넷으로 본 폴란드 중부 도시 토룬(Torun)의 유치원 교사 그라지나 슈브리친스카르 씨가 피란 온 우크라이나 아이들을 돌보면서 느낀 소회를 '공통어가 필요해요'라는 제목의 기고문으로 보내왔다. 토룬은 김광균 시인의 ‘추일 서정’에도 등장하는 도시다. 시는 “낙엽은 폴란드 망명 정부의 지폐/ 포화에 이지러진/ 도룬(토룬) 시의 가을 하늘을 생각게 한다”로 시작한다.

이번 기고문 역시 한국에스페란토협회 부산지부 회보 ‘테라니도(TERanidO)’의 편집장인 장정렬 전 동부산대 외래교수를 통해 전달됐으며, 이 과정에서 장 전 교수가 에스페란토 번역을 맡았다. 아이들의 얼굴 사진도 그들로부터 <부산일보> 게재를 허락받은 것이다.

피난 학생에 “우리 유치원으로…”
학급 출입문에 우크라 국기 걸고
책상 가득 과자 등 선물 놓고 환영

우크라 아동 혼자 있는 시간 많고
언어 차이로 소통 힘들어 어려움
공용어 사용 통한 문제 해결 필요

저는 폴란드 중부 토룬시의 제35 초등학교 내 유치원 교사입니다. 대학원에서 교육학(초등 교육)을 전공했고요. 토룬 시는 지동설을 주장한 코페르니쿠스(1473~1543)가 태어난 곳입니다. 저는 이곳에서 3년째 똑같은 나이의 아동들에게 에스페란토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또 모든 나라와 민족, 문화에 대한 관용과 존경심을 이곳 아동들에게 심어주고 있고요.

올해 2월 말 우크라이나에 대한 공포의 소식이 들려오기 시작했고, 그 이후로 저는 6살 아이들에게 전쟁 이야기를 들려줘야 했습니다. 우리 학급의 아동들도 그 소식을 듣고 있지만, 학부모들은 자녀들에게 이를 주제로 대화를 나누는 것을 주저했습니다.

우리는 학급 출입문에 푸른색·노란색(우크라이나 국기 색) 하트 모양을 직접 걸어 두기로 결정했습니다. 우리 학급에서는 자주 폴란드와 우크라이나의 우의를 위해 이런 그림을 그립니다.

제가 근무하는 학교도 우크라이나를 도울 다양한 물품들을 모집한다는 안내문을 학생들을 통해 집으로 보냈습니다. 이는 주로 우리 도시의 우크라이나 자매도시 우츠크에 보낼 위문 물품이었습니다. 학부모들은 자신의 아이들과 함께 학교로 엄청 많은 물품들을 가져왔습니다. 우리 반 아동은 거의 모든 그림에 우크라이나 국기를 붙였습니다.

어느 날, 제가 한 남자 아동에게 물었습니다. “만일 지금 폴란드-우크라이나 축구 경기를 보고 있다면, 너는 어느 팀이 이기기를 바라니?” 그 물음에 그 아동은 쉽사리 답을 내놓지 않았습니다.

며칠 뒤 우리는 평소처럼 책 읽기를 시작했습니다. 그날 우리 학급 아동들이 제게 불평을 쏟아 놓았습니다. "다른 반은 이미 우크라이나 학생들을 받았다고 하는데, 그럼 우리는 언제 그들을 받아요?” 한 시간 뒤, 학교 관계자가 와서 우리 학급에 새로 책걸상을 몇 개 가져다 놓았습니다.

우리 반 아동들은 ‘우리도 이제 누군가를 손님으로 받아들일 수 있겠구나’ 하는 희망을 보였습니다. 자기 옆에 누굴 앉힐 것인지, 내 짝으로 오는 손님 학생에게 무슨 선물을 줄 것인지 서로 말하기도 했습니다. 곧 저는 “이 사항은 의무적인 것은 아니지만, 만일 누군가 할 수 있으면”이라고 써서 학부모들에게 통지서를 보냈습니다. 다음 날 아침, 우크라이나에서 피란 온 2명의 남자 아동을 환영하는 수많은 과자, 책, 장난감, 필통, 액세서리가 선물로 도착했습니다.

이 2명의 남자 아동은 형제인데, 같은 해에 태어났다고 합니다(형은 1월, 동생은 12월). 우크라이나에 있을 때, 형은 초등학교에 들어가 배웠지만, 폴란드에서는 학제가 달라 형은 다시 유치부에 속해야 했습니다. 형은 우크라이나어와 함께 러시아어도 조금 알고 있어 온 유치원에서 통역사이자 도우미 역할을 해 주었습니다.

형제 중 동생은 곧 다른 아동과 마음을 터놓기 시작해, 더는 두려움을 감추기 위해 썼던 '후드'를 쓰지 않으려고 했습니다.곧 그 형제 둘은 모두 다른 아이들과 잘 소통하며 놀이, 앉기, 춤추기 등에 빨리 적응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학급 수업 때나 놀이를 함께 할 때 러시아어를 자주 사용해야 했습니다. 또 제가 너무 오래 폴란드어로만 말하고 있으면, 그 형제는 곧장 요청했습니다. “그럼 저희들은요?” 그 형제는 수업 활동에도 아주 적극적이었습니다. 똑같은 낱말을 러시아어-우크라이나어-폴란드어로 써 놓고 비교해가면서, 그 아이들은 재빠르게 자신의 낱말들을 풍부하게 했고, 더욱 더 많은 폴란드 문장을 사용하고 아주 잘 이해하기도 했습니다.

오늘은 또 다른 학급의 피란 아동 엄마들과 더 길게 대화를 했습니다. 저는 아무렇지 않게 그들을 도와주려 애쓴 것 같아도, 집에 돌아와서는 그 가족의 운명을 생각하며 울었습니다. ‘저 가족의 앞으로의 운명은 어찌 될는지?’

러시아어를 사용할 줄 모르는 다른 학급의 우크라이나 학생들의 생활은 더 다양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그 학급 담임 선생님들은 우크라이나어를 조금 더 배우는데 애를 쓰고 여러 가지 번역 도구들을 사용하였지만, 아동과의 친교나 이해 속도가 더디기만 했습니다.

3살과 4살의 아동들은 언제나 선생님들과 함께 있지 않으면, 혼자 있는 편입니다. 5살 된 여자 아동 둘은 같은 나이 또래의 여아와 함께 놀기를 좋아합니다. 하지만 그 아이들은 직장 생활을 하는 부모들로부터 격리되어 있기 때문인지 자주 울거나 슬픔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그 반에서 가장 큰 문제를 가진 이는 다니엘이라는 아이입니다. 그 반 선생님들이 제게 말하기를, 그 아이는 여기에 배정 받은 셋째 날까지 똑같은 뭔가를 말하고 있다고 합니다. 제가 그 아동에게 다가가니, 그 아이가 말하는 것이 들려왔습니다. "러시아가 우리를 침략했고, 우리가 사는 집을 파괴했고, 나는 엄마와 아이들과 함께 피난해야 했어. 여러분이 나를 받아줘 고마워.” 그 귀여운 아동이 이곳 친구들에게 그 고백을 하는데, 또 그가 하는 말을 이해해 줄 사람을 만나는데,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했는지요.

공통의 놀이 시간에 바깥에서 몇 명의 아이들이 불평을 합니다. 언제나 그 학급 아동들은 자신들이 모래성을 쌓아두면, 다니엘이 와서 그걸 뭉개버린다고 불평했습니다. 제가 그런 사정을 설명해주자, 다니엘은 그런 행동을 즉각 중단했습니다. 하지만 곧 다니엘은 막대기로 교내 나무들을 크게 때리면서,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토로하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러시아를 없애버릴 테다. 그들이 아무도 더는 상처를 주지 못하도록 말이야.” 그래서 저는 저 나무들도 네가 때리면 고통을 당한다고 설명하니 그 아동은 제게 이런 요청을 했습니다. "저와 좀 놀아 주세요. 뭐든 하면서요. 제 곁에만 좀 있어 주세요.”

다른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 아동은 자신이 태어나 자란 곳에 체험한 연이은 포탄 공격에 대해 이야기를 하려고 저를 불러 세우기도 했습니다. 저는 그러면 제안을 하기도 합니다. “싸우는 일은 어른들에게 맡겨 둬. 너는 지금 우리 곁에 안전하게 있단다. 놀이도 하고, 먹기도 좀 하렴.”(그 다니엘이라는 학생은 저와 만난 뒤에야 뭐든 먹기 시작했답니다.) 그 이후 저는 그로부터 더는 전쟁에 대해 듣지 않았고, 저를 보면 살짝 웃음을 되찾은 것 같았습니다. 그 아이에게는 자신이 이해할 수 있는 한 문장, 한 언어면 충분했습니다.

어느 날, 선생님 중 한 분이 병가를 내 출근을 못하자 두 반이 합반이 되어 수업을 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우리 유치원의 7명의 우크라이나 학생들도 돌봐야 했습니다. 그들은 수많은 말을 했지만, 거의 우크라이나어로만 했습니다. 저는 언제나 반응을 보였습니다. "정말이야? 그래서? 그런 행동은 하지 마. 그 장난감을 돌려 줘.” 학급의 도우미 선생님들은 그 아이들이 그만큼 개방적이고, 말수가 많고, 유쾌하게 지내고 있음을 처음에는 믿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그 아동들은 오로지 자신을 이해하는 사람하고만 대화하려고 합니다.

저는 그들을 안아주고 “안녕하세요, 재미있게 지내요” 등의 간단한 인삿말을 하기 위해 다른 학급에도 자주 들어가 보려고 노력합니다. 그 아동이 등교하는 동안, 또 하교해 집에 가려고 할 때 그 아동들이 제가 있는 학급에 들러 저를 한 번 보고는 곧장 미소를 짓습니다. 또 제게 안기려고 달려오고, 뭔가를 황급히 말하려고 달려오기도 합니다.

그 아동들의 어머니들도 제게 조직의 일로 도움을 주러 오기도 하고 자녀의 행동에 대해 묻기 위해 오기도 하지만, 그들이 폴란드 안에서 일자리를 성공적으로 찾았다는 것을 자랑하러 오기도 합니다. 만일 다양한 나라의 사람들이, 아동이든 학부형이든 공통의 언어인 에스페란토를 사용한다면, 그 피난민들의 삶은 얼마나 좀 더 쉬워질까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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