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뭇가사리 캐러 부산 가게” 제주해녀 돛배 타고 영도로
[부산숨비] 육지 해녀 (1)
“성산일출 바려두곡/소완도로 가는구나~(중략)~ 다대끗을 넘어가민/부산영도 이로구나.”
제주도 해녀가 돛배를 타고 부산으로 올 때 불렀다는 노래 중 일부다. 19세기 후반 제주 해녀가 부산 다대포(다대끗)를 거쳐 영도에 정착했다. 제주도 밖 ‘육지’에 해녀가 처음 자리 잡은 도시. 부산 앞바다에 쓸 만한 ‘물건’이 많았기 때문일까. 전복이나 미역처럼 입 안에 바다향을 퍼뜨리는 해산물을 떠올리기 쉬울 테다.
1930년대 미역의 1066배 ‘금값’
영도 바다 생산 해조류 품질 좋아
바닷길 통해 일본 수출도 용이
출향 물질하다 아예 정착한 듯
부산에 해녀가 늘어나던 시기에 가장 매력적인 해산물은 정작 먹는 게 아니었다. 당시 식용보다 산업 원료로 쓰인 ‘우뭇가사리’ 같은 해조류가 대표적이다. 일제강점기를 포함한 20세기까지 감태 등과 함께 귀한 대접을 받았기 때문이다. 여기에 부산은 바닷길로 수출까지 용이한 지리적 이점이 있었다. 부산은 제주 해녀들을 부를 독특한 매력이 있었던 셈이다.
“영도 바다에 우뭇가사리나 곰피 등 해조류가 엄청 많았어. 제주도 해녀들이 여기서 우뭇가사리를 캐면 일본에 수출도 많이 했지.”
올해 1월 영도구 동삼어촌계 해녀 이정옥(67) 부녀회장이 <부산일보> 취재진을 처음 만났을 때 한 말이다. 지금과 달리 영도 앞바다에 해조류가 많았다고 설명하며 우뭇가사리를 대표적인 ‘물건’으로 꼽았다.
“옛날에는 우뭇가사리 뜯어먹고 살았어. 남천동만 해도 선주가 제주도 해녀들을 수백 명씩 데려왔지.” 수영구 남천어촌계 강인공(82)·노봉금(76) 해녀도 우뭇가사리 덕에 제주도 해녀들이 몰려온 때가 있었다고 증언했다.
이처럼 부산 곳곳에 있는 해녀들은 우뭇가사리 몸값이 높았다는 시절이 있었다고 입을 모은다. 실제로 한국해양대 국제해양문제연구소 안미정 교수가 발표한 ‘식민지 시대 한·일해역의 자원과 해녀의 이동’ 논문에 따르면 우뭇가사리라고 불린 천초는 19세기 후반부터 고가로 거래됐다. 우뭇가사리는 건축 재료로 사용되거나 양갱 등을 만드는 한천 재료로 쓰였다.
논문에는 우뭇가사리 가격이 미역과 큰 차이가 났다는 기록도 있다. 1916년에 66배, 1930년대에는 무려 1066배까지 될 정도로 가격 차이가 벌어졌다. 안 교수는 “일본 상인들이 산지까지 가서 우뭇가사리를 구매했는데 부산에서 수확한 것은 품질이 좋아 옷감 광택을 내는 재료로 쓰여 일본 비단 제조상 등이 값을 후하게 쳐줬다”고 언급했다. 일본은 1905년 조선 바다에 있는 우뭇가사리를 조사했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우뭇가사리 몸값은 시대가 지나면서 크게 꺾였다. 사하구 다대어촌계 윤복득(71) 부녀회장은 “옛날에는 5~6월 전까지는 우뭇가사리를 잡지 않았고, 5월부터 날짜를 정해 다 같이 채취했다”며 “지금은 그게 큰 소득이 없어 공동 작업을 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부산은 값비싼 해산물만 많은 곳이 아니었다. 국내 곳곳을 넘어 일본까지 수출이 가능한 바닷길을 갖춘 곳이었다. 제주도처럼 다른 해녀들과 경쟁도 적은데 양질의 해산물이 많고 유통망까지 좋으니 해녀들에게는 부산이 매력적일 수밖에 없었다.
1926년에는 일본으로 수출된 해초 중 73%가 부산을 통해 수출됐다는 기록도 있다. 유형숙 동의대 한일해녀연구소장은 “제주 해녀들이 우뭇가사리를 캐러 출향 물질을 왔는데 부산은 판매하기도 편해 정착하는 해녀들이 많았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들이 육지 해녀의 기원이다.
이우영·장병진 기자 verdad@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