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인문학 기행] 헝가리인들은 왜 갈가마귀를 사랑할까?

남태우 선임기자 leo@busan.com
부산닷컴 기사퍼가기

[유럽 인문학 기행-헝가리] 마차슈 대성당


헝가리 부다페스트의 부다 지구에서 가장 유명한 성당은 역대 국왕 대관식이 거행됐던 마차슈 대성당이다. 대성당의 탑 꼭대기에는 반지를 문 갈가마귀 인형 하나가 달려 있다. 너무 작아서 자세히 살피지 않으면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다. 대부분 관광객은 탑 꼭대기를 바라볼 생각을 않고 그냥 스쳐 지나간다. 하지만 헝가리에서 가장 위대한 왕 중 하나였던 마차슈의 전설이 담긴 갈가마귀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사정은 달라진다. 한 번쯤 고개를 들어 갈가마귀가 어디에 있는지 찾아보고 싶은 충동이 생길 수밖에 없다.



마차슈 대성당과 탑 꼭대기의 갈가마귀. 마차슈 대성당과 탑 꼭대기의 갈가마귀.

■갈가마귀와 금반지

무엇 때문인지 잔뜩 화가 난 ‘북풍의 신’ 보레아스는 차가우면서 거센 겨울바람을 불어댔다. 헝가리 페스트 거리에는 전날 밤에 내린 하얀 눈이 소복하게 쌓였다. 날씨가 제법 싸늘한 탓에 길을 오가는 행인은 드물었다. 1458년 1월 24일이었다.

페스트 외곽 다뉴브 강 한쪽의 작은 마을에 아름다운 대저택 한 채가 있었다. 주변의 다른 집들과는 규모나 외양에서 비교할 수 없는 집이었다. 대저택의 베란다에는 중년의 여인이 근심스러운 표정을 하고 서 있었다. 금색 실로 바느질한 화려한 보라색 옷을 입었고. 목에는 종류를 알 수 없는 값비싼 보석을 매단 목걸이를 걸었다. 두 손은 아주 미세하게 떨었다.

“국민의회 결과가 어떻게 됐는지 아직도 연락이 오지 않았느냐?”

여인은 베란다 한쪽 모퉁이에 서 있는 시녀를 돌아보면서 입을 열었다. 시녀는 아주 곤란하다는 듯 고개를 숙일 뿐 대답을 하지는 않았다.

여인의 이름은 실라지 에르제벳이었다. 2년 전 갑자기 세상을 떠난 헝가리의 장군 겸 정치인인 훈야디 야노시의 부인이었다. 시녀가 아무 말을 하지 못하자 그녀는 다시 고개를 돌려 다뉴브 강을 바라보았다. 강 위로는 이름 모를 새들이 날았다. 꽁꽁 언 강에서 물고기를 잡지 못해 애를 태우는 듯 새들은 하늘 높이 날았다가 수면 근처로 내려오기를 반복했다.

그때였다. 멀리서 말이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이 추운 날씨에 재미 삼아 다뉴브 강 주위에서 승마를 즐길 사람은 없을 터였다. 그렇다면 분명히 급한 볼일이 있어 어디론가 달려가고 있는 말이 분명했다. 멀리서 나타난 말은 뽀얀 먼지를 일으키더니 금세 에르제벳의 집 앞까지 달려왔다. 그녀는 기다리던 소식을 들고 온 사람임에 틀림없다는 생각을 하며 서둘러 1층으로 내려갔다.


마차슈 대성당 전경. 마차슈 대성당 전경.

“마님, 기뻐하십시오. 좋은 소식을 갖고 왔습니다.”

“어떻게 됐나? 국민회의에서는 어떻게 결정했다던가?”

“마차슈 도련님을 헝가리의 국왕으로 선출하기로 합의했습니다. 조만간 보헤미아의 프라하로 사절을 보내 도련님을 모셔오기로 했습니다. 실라지 미하이 나리는 도련님이 성장할 때까지 섭정을 맡기로 하셨습니다.”

말을 타고 온 사내의 싱싱한 목소리를 들은 에르제벳의 표정이 환하게 밝아졌다. 드디어 지난 2년 동안 기다려왔던 소식이 이제야 전해진 것이다. 그녀는 사내에게 사랑방에 가서 식사나 하라고 격려한 뒤 다시 베란다로 올라갔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뺨을 스치던 북풍이 무척이나 차게 느껴지더니, 이제는 거꾸로 매우 신선하고 시원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의 마음이란 이렇게 간사하구나, 라며 그녀는 빙긋 웃었다.

에르제벳은 베란다 한쪽에 있는 새장에서 새 한 마리를 꺼냈다. 편지를 전달하도록 훈련받은 갈가마귀였다. 그녀는 시녀에게 갈가마귀를 맡긴 뒤 손가락에서 금반지를 빼냈다. 전날 밤 모든 희망을 걸며 미리 글을 적어두었던 작은 쪽지를 품에서 꺼냈다. 에르제벳는 금반지를 갈가마귀의 부리에 깊숙이 걸고 그 사이에 쪽지를 쑤셔 넣었다. 그리고 갈가마귀의 이마에 입을 맞춘 뒤 하늘로 힘껏 날려 보냈다.

‘한시라도 늦어서는 안 된다. 절대 쉬지 말고 바로 프라하까지 날아가서 마차슈에게 반가운 소식을 전해다오.’


반지를 입에 문 갈가마귀. 반지를 입에 문 갈가마귀.

■훈야디 가문의 위기

“응~애, 응~애!”

“핫핫, 이놈도 목소리가 큰 걸 보니 제 형처럼 용감한 장군이 될 거야!”

1443년 오늘날 루마니아 영토인 콜로츠바르에서 씩씩한 아기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훈야디와 에르제벳의 둘째 아들인 마차슈가 막 태어난 것이다. 수많은 전쟁에서 헝가리에 승리를 안겨준 영웅인 훈야디는 큰아들 라즐로에 이어 자신을 도와줄 다른 아들이 태어난 것을 무척 기뻐했다.

훈야디는 마차슈보다 열두 살 많은 라즐로를 늘 전쟁터에 데리고 다녔다. 둘은 전쟁을 하러 가거나, 아니면 부다 성의 궁정에서 지내는 일이 많았다. 마차슈는 어릴 때부터 어머니 에르제벳과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어머니는 동유럽에서 유명하다는 학자들을 모두 초빙해 아들을 가르치게 했다. 마차슈는 조기교육 덕분에 여러 나라 언어와 고전문학에 정통하게 됐다. 그는 모국어인 헝가리어와 루마니아어는 물론 라틴어, 터키어, 그리스어, 이탈리아어, 폴란드어, 체코어, 독일어를 능숙하게 말하고 쓸 수 있었다. 거기에 외삼촌인 실라지 미하이로부터 군사학도 체계적으로 배워 전쟁도 잘 이해하게 됐다.

마차슈가 열세 살이던 1456년 훈야디 집안에 큰 위기가 닥쳤다. 집안의 기둥인 아버지 훈야디가 갑자기 세상을 떠난 것이다. 큰아들인 라즐로가 집안의 대들보 역할을 맡게 됐다. 아버지를 따라 전쟁터에 다닌 탓에 전투에 능했던 그는 매우 용감하고 신속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부다 성 전경. 부다 성 전경.

“지금은 우리 집안에 큰 위기일 수도 있고, 오히려 좋은 기회일 수도 있습니다. 항상 조심스럽고 신중하게 행동해야 합니다.”

라즐로는 늘 아버지로부터 정적인 울리크 2세 공작을 조심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울리크 2세는 국왕 라즐로 5세 어머니의 사촌동생이었다. 사촌누나의 총애를 받은 그는 라즐로 5세 취임 이후 온갖 위세를 떨어 백성들의 지탄을 받았다. 울리크 2세는 훈야디 집안의 새 가장이 된 라즐로를 집으로 초대했다. 말이 초대였지 사실상 소환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는 이제 겨우 스물다섯 살인 라즐로를 어린애 취급하며 무시했다. 거만한 자세로 의자에 앉아 라즐로에게 호통을 쳤다.

“훈야디 장군은 나라에 많은 빚을 졌어. 자네가 훈야디 가문의 새 책임자가 된 만큼 아버지 빚은 자네가 갚아야겠지? 자네 집안이 갖고 있는 성을 모두 넘겨준다면 내가 대신 빚을 갚아주도록 하겠네.”

라즐로는 집에 돌아가 어머니에게 울리크 2세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전했다. 어머니는 절대 그런 일이 없다고 길길이 뛰었다. 남편 훈야디는 절대 나라에서 돈을 빌려 함부로 쓸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라즐로가 생각해 봐도 아버지가 국가에 빚을 졌다는 이야기를 한 번도 들은 적은 없었다.

“울리크 2세가 저를 만만히 보고 우리 집안을 파멸시키려고 하나 봅니다. 그 작자에게 본때를 제대로 보여줘야겠습니다.”

라즐로는 며칠 뒤 신뢰하는 무사 여러 명을 울리크의 집 근처에 잠복시켰다. 마치 세상이 제 것이 된 것처럼 거만해진 울리크는 술에 취한 채 시종 몇 명과 함께 밤늦게 귀가했다. 무사들은 제비처럼 뛰어나와 시종들을 모두 쫓아버리고 울리크를 인근 골목으로 끌고가 죽여버렸다.

겁이 많았던 라즐로 5세는 평소 자신을 무시하기는 했지만 어쨌든 어머니의 사촌동생이었던 울리크를 믿고 의지했다. 그랬던 울리크가 사라지자 모든 방어막이 사라져버린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라즐로가 자신마저 죽이는 게 아니냐는 두려움에 떨게 됐다. 그는 울리크 외에 가장 신뢰하던 귀족 가라이 라슬로를 불러 대책을 상의했다. 가라이는 국왕의 귀에 소곤소곤 대책을 일러 주었다.


다음날 아침 라즐로 5세는 편지를 직접 써서 라즐로에게 보냈다. 가라이가 시킨 대로 적은 편지였다.

‘울리크는 평소 짐을 능멸해왔던 자다. 일찍이 그자를 벌주려 했지만 어머니의 사촌동생이라서 도저히 어떻게 할 방법이 없었다. 라즐로 장군이 짐의 마음을 헤아려 심신을 평안하게 해줄 길을 제시했으니, 내가 어찌 장군을 처벌할 수 있겠는가? 오히려 라즐로 장군과 장군 집안에 상을 내림이 마땅하도다. 내일 모든 귀족들이 모인 자리에서 라즐로 장군의 업적을 기리려 하니 반드시 부다 성에 입성해 짐의 기쁨을 배가 되도록 하라.’

라즐로의 어머니와 외삼촌은 국왕의 행동이 미심쩍다면서 입궐을 잠시 미루고 궁의 내부 사정을 살펴보자고 했다. 라즐로는 용감한 청년이었지만 젊은 나이 탓에 신중하지는 않았다. 그는 국왕의 편지를 받고 흥분한 나머지 어머니, 외삼촌의 만류를 뿌리치고는 동생 마차슈와 함께 다음 날 오전 부다 성에 입궐했다. 두 형제가 라즐로 5세에게 인사를 드리려고 무릎을 막 꿇던 참이었다. 왕의 의자 뒤에서 가라이가 뛰쳐나오더니 큰소리로 외쳤다.

“저 무도한 자를 붙잡아 형틀에 매달도록 하라. 국왕의 친척을 한밤중에 암살하고 왕 자리를 찬탈하려 한 대역무도한 자로다.”

가라이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기둥 뒤에 숨어있던 군사들이 우르르 달려 나와 두 사람을 꼼짝 못하게 결박했다. 라즐로를 따라갔던 병사들은 사방에서 달려든 왕궁 근위대와 가라이가 데려간 사병의 공격을 받고는 모두 쫓겨났다. 라즐로와 마차마차슈는 바로 재판을 받았다. 그들이 뒤집어쓴 죄명은 반역이었다. 재판관은 이미 국왕으로부터 지시를 받은 상태였기 때문에 재판을 질질 끌 생각도 하지 않고 서둘러 사형을 선고했다. 라즐로는 곧바로 부다 성 한가운데에서 교수형을 당해 목숨을 잃었다. 형보다 어린 마차슈의 사형은 며칠 뒤로 미뤄졌다.

매형인 훈야디와 함께 많은 전투에 나서 큰 성과를 거둔 장군이었던 마차시의 외삼촌 실라지는 조카 라즐로의 처형 소식을 듣고 반란을 일으켰다. 그는 티자 강 동쪽 지역을 점령해 근거지로 삼은 뒤 부다 성으로 진격할 준비를 했다.

원래 겁이 많았던 라즐로 5세는 귀족들을 믿지 못했다. 그들이 목숨을 걸고 왕을 지켜줄 것이라고 확신할 수 없었다. 그는 반란군이 내일이라도 부다 성으로 진격해 자신의 목을 딸지 모른다며 두려움에 떨다 프라하로 달아났다. 도망가는 와중에도 마차슈를 인질로 끌고 가는 것만은 잊지 않았다.


마차슈 동상. 마차슈 동상.

라즐로 5세는 그해 11월 프라하에서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그에게는 자식이 하나도 없었다. 그의 매형인 빌헬름 3세가 헝가리 왕 자리에 욕심을 냈지만 헝가리 귀족들은 그를 지지하지 않았다. 귀족들은 새 국왕을 선출하기 위해 1458년 1월 페스트에서 국민회의를 소집했다.

헝가리 백성들은 훈야디는 물론 억울하게 처형 당한 그의 아들 라즐로를 무척 좋아했다. 전쟁에 나갈 때마다 백성들에게 승리의 기쁨을 안겨준 영웅이었기 때문이다. 백성들은 훈야디의 아들이자 라즐로의 동생인 마차슈가 새 국왕이 되기를 바랐다. 교황 갈리스토 3세의 최측근인 후안 카르바할 주교도 마차시를 노골적으로 지지했다. 그는 원래 훈야디와 매우 친한 사람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신앙심이 깊은 마차슈를 좋아하십니다. 그가 왕좌에 오르면 헝가리뿐만 아니라 교황청에서도 축하 사절을 보내실 겁니다.”

국민의회를 좌지우지하는 귀족들의 생각은 달랐다. 그들은 라즐로가 처형당할 때 국왕 편을 든 사람들이었다. 만약 마차슈가 국왕으로 등극하면 형의 원수들을 그냥 두지 않을 것이라는 게 그들의 두려움이었다. 귀족들은 다른 사람을 국왕으로 앉히고 싶어 했다. 그러나 마차슈의 삼촌인 실라지가 대군을 이끌고 페스트 외곽에 진을 치고 있었기 때문에 함부로 경거망동할 수도 없었다. 이때 라즐로를 처형시키는 데 앞장선 가라이는 타협안을 제시하자고 했다.

“국왕으로 받아들일 테니 절대 라즐로의 처형에 대해 복수를 하지 말라는 조건을 내겁시다.”

다른 귀족들은 가라이의 말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지 않았다가는 당장 실라지의 병사들에게 목숨을 잃을 처지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할 수 없이 마차슈를 국왕으로 선출하기로 만장일치로 합의했다.


마차슈 취임식 장면을 담은 부조. 마차슈 취임식 장면을 담은 부조.

■갈가마귀가 전해준 행운

에르제벳이 날려보낸 갈가마귀는 페스트에서 프라하까지 곧바로 날아갔다. 먹이를 먹지도 않고, 잠시 휴식할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동안 여러 번 프라하에 다녀온 것인지 갈가마귀는 프라하의 어느 집으로 가야할지를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톡~톡~”

갈가마귀는 프라하 성으로 날아가더니 성의 한쪽 모퉁이에 있는 맨 끝 방의 창문을 두들겼다. 잠시 후 창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갈가마귀는 주저하지 않고 방 안으로 날아 들어갔다. 방에는 10대 중반으로 보이는 어린 소년이 있었다. 다름 아닌 에르제벳의 둘째 아들인 마차슈였다.

“갈가마귀야, 오랜만이구나. 오늘은 어떤 소식을 가지고 왔느냐?”

지친 갈가마귀의 머리를 쓰다듬던 마차슈는 새의 부리를 보고 깜짝 놀랐다. 어머니가 아끼던 금반지가 걸렸기 때문이다. 작은 쪽지도 보였다. 평소 같으면 어머니가 갈가마귀의 다리에 편지를 둘둘 말아 보냈을 텐데, 라고 그는 생각했다. 마차슈는 반지와 쪽지를 꺼낸 뒤 갈가마귀에게 물과 먹이를 가져다주었다. 쪽지에는 반가운 소식이 적혀 있었다.

‘마차시, 이제 드디어 아버지의 숙원과 네 형의 원한을 풀 수 있게 됐구나. 국민회의가 너를 헝가리 국왕으로 선출했단다. 조만간 사절단이 너를 데리러 갈 테니 그때까지 몸조심하고 있거라.’


마차슈 대성당의 갈가마귀. 마차슈 대성당의 갈가마귀.

헝가리 귀족으로 구성된 사절단이 프라하로 찾아간 것은 마차슈가 갈가마귀의 편지를 받고 이틀 뒤였다. 마차슈는 사절단과 함께 헝가리로 돌아가 백성들의 뜨거운 환영을 받으며 부다 성에 도착했다. 그는 지체하지 않고 곧바로 마차시 성당에서 즉위식을 치렀다.

마차슈는 헝가리인으로서는 150년 만에 헝가리 국왕 자리에 오른 지도자였다. 그는 문학과 미술 등 예술 진흥에 힘쓴 르네상스 스타일의 군주였다. 가난한 사람을 돕는 데 온힘을 다했고, 수시로 거리에 나가 백성들을 만나 고충을 들었다. 그래서 ‘백성의 왕’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헝가리인들은 그를 초대 국왕 이슈트반과 함께 헝가리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왕이라고 칭송한다.

마차슈가 프라하에서 반지를 문 갈가마귀를 본 다음에 국왕이 됐기 때문에 반지를 문 갈가마귀는 훈야디 가문의 상징이 됐다. 어릴 때 훈야디 마차슈였던 그의 이름은 라틴어로 갈가마귀를 뜻하는 ‘코르비누스’를 붙여 마차슈 코르비누스로 바뀌었다.

마차슈 대성당은 1015년 국왕 이슈트반에 의해 건립됐다. 그가 무슨 이유로 어떻게 성당을 지었는지 자료는 남아 있는 게 없다. 마차시는 국왕 자리에 오른 뒤 이슈트반이 건설한 대성당을 완전히 새로 짓다시피 재건축했다. 대성당이 오늘날의 모습을 갖게 된 것은 바로 이때였다. 그는 새로 건설한 대성당의 탑에 갈가마귀 인형을 설치하게 했다. 갈가마귀는 마차슈 대성당은 물론 부다페스트 시내 여러 곳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마차슈 대성당의 갈가마귀. 마차슈 대성당의 갈가마귀.




남태우 선임기자 leo@busan.com

당신을 위한 AI 추천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