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3 학생들이 벽면 낙서? 미술 창작 수업 중입니다!
‘고교학점제’ 선도학교 동래고 가 보니
최근 대통령직 인수위가 특목고·자사고 존치 방침을 밝히면서 2025년 전면시행이 예고된 ‘고교학점제’에도 변화가 있을지 관심이 쏠린다. ‘교육의 다양성’ 차원에서 도입은 하되 유예될 가능성이 점쳐지는 가운데, 부산지역 학교의 준비 상황을 살펴봤다.
2025년 전면시행 앞두고 다양한 수업 시도
대학처럼 과목 선택… 천편일률 수업 탈피
개설 쉽지 않은 ‘미술 창작’ 등 공부 가능
교사와 전문가 확보·정시 확대는 숙제
■‘낙서’ 아니라 ‘수업’입니다
지난 21일 오후 4시께 부산 동래고 본관 2층. 창밖에선 반가운 봄비가 내리는 와중에, 미술실 주변 복도와 계단을 따라 학생들이 무언가에 열중하고 있다. 화장실 입구 벽엔 초원과 말 스케치가 한창이고 3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옆 벽면은 아이언맨이 칠해지고 있다.
개구진 학생들의 낙서인가 싶지만, ‘미술 창작’이란 정식 수업이다. 동래고는 올 1학기, 3학년 학생들을 대상으로 이 수업을 개설해 현재 14명의 학생들이 수강 중이다. 미대 지망생 2명을 빼고 나머지는 모두 일반 학생들이다.
입시 준비만으로도 빠듯할 시기에 ‘책 대신 붓’이라니, 여느 고3과 어울리지 않는 풍경이다. 특히 이 수업은 기존 미술 수업과 달리 학생 스스로 아이디어를 내고, 시한 없이 각자 진도에 맞춰 작업을 하는 게 특징이다. 박영환 미술교사(교무운영부장)는 꼭 필요할 때만 조언을 하며 조금씩 거든다. 박 교사는 “초반 한 달은 아이들에게 왜 이 작업을 스스로 해야 하는지 당위성과 자신감을 심어주는 시간이었고, 바깥 작업을 한 지는 3주차”라며 “지시를 하면 성과가 더 좋을 수 있겠지만, 부담감 없이 새로운 경험을 통해 용기를 얻을 수 있는 방식으로 수업을 진행한다”고 설명했다.
덕분에 처음엔 자신없어 하던 학생들도 서서히 태도가 달라졌다. 보건계열을 지망하는 박상현(18) 군은 “평소 그림에 관심이 있었지만 고3이 되면서 여유가 없어져, 이 수업 시간이 유일하다”며 “압박감 없이 내 생각을 그림으로 펼치고, 공부 스트레스도 풀 수 있어 좋다”고 말했다.
무심히 복도를 지나치던 학생들도 조금씩 그림이 완성되는 과정을 지켜보며 “내년에도 수업이 생기면 참여하고 싶다”고 관심을 보일 정도다.
■‘고교학점제’는 이미 진행 중
고교학점제는 학생들이 천편일률적인 수업에서 벗어나 자신에게 필요한 과목을 공부하면서 적성과 소질을 발견하고, 진로를 개척할 수 있게 하자는 취지에서 도입됐다. 1학년 때 공통교과목을 배운 뒤 2·3학년 때 본격적인 선택수업을 하는데, 주로 2학년은 일반선택과목, 3학년은 진로선택과목을 수강하는 식이다.
동래고는 지난해 ‘고교학점제 선도학교’로 선정된 이후 본격적으로 다양한 교과목을 운영해오고 있다. 선도학교 2년차인 올 1학기는 2학년 22과목, 3학년 38과목이 개설돼, 지난해보다 5~6과목씩 늘었다. ‘미술 창작’, ‘공학 일반’, ‘창의 경영’ 등 그동안 개설이 쉽지 않았던 교과목은 물론, 독일어·일본어 회화 같은 제2외국어 교과목도 여럿 운영한다. 이를 위해 기존 교사 60여 명에다 시간강사 4명을 추가로 두고 있다.
덕분에 학생들은 과목선택권이 많아졌다. 3학년의 경우 9반까지 있지만, 수업 교실은 최대 12개 학급까지 늘어난다. 학생들은 6개 밴드(수업별 그룹)로 나눠, 교실을 옮겨다니며 수업을 듣는다.
특히, 동래고는 부산에서 ‘완전개방형’으로 교육과정을 운영하는 몇 안 되는 학교 중 하나다. 3년 동안 교과 180단위(교시) 중 필수 이수단위를 제외한 나머지 수업의 경우, 국·영·수 기초과목부터 사회·과학탐구, 생활·교양까지 학생들이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다.
대학생처럼 원하는 수업을 골라듣는 방식에 익숙지 않은 학생들을 위해 신입생 때부터 2·3학년 수강예시를 안내하기도 한다. 동래고 문지숙 교육과정부장은 “주변 학교에 비해 교사 수가 많은 편이어서 고교학점제 취지를 살리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며 “학생들에게 선택의 기회를 여러 번 주기 위해 일부 과목은 2~3개 학기에 걸쳐 중복 개설해, 2·3학년 성적을 같이 산출하는 ‘무학년제’도 운영 중이다”고 설명했다.
■‘진로 맞춤 수업’ 정착하려면
2020년 마이스터고, 올해 특성화고를 거쳐 일반계고로 점차 확대하고 있는 학점제는 3년 뒤 국내 모든 고등학교에서 전면 시행된다. 일반계고의 경우 내년에 입학하는 1학년부터 기존 204단위(주 34교시)에서 192학점(주 32교시)으로 전환되며, 2025년에는 1~3학년 전체가 같은 방식으로 수업을 실시한다.
학부모 입장에선 갑작스러워보이지만 학교현장은 이미 2018년부터 선택형 교육과정 등을 운영하며 고교학점제에 대비해왔다. 부산도 시교육청의 주도로 학생들의 과목선택권을 확대하기 위해 다양한 제도를 마련하고 있다. 인접한 2~4개 학교가 공동으로 과목을 개설하는 ‘플러스 교육과정’을 비롯해, 개설이 쉽지 않은 과목은 온라인 방식의 ‘바로교실’을 운영하고, 예체능 교과목이나 실험 기자재가 필요한 융합수업의 경우 지역대학과 연계하기도 한다.
특히 개성고와 부산센텀여고는 온라인 공동교육 거점센터로 지정돼 전문 스튜디오를 갖췄다. 15학급 이하 소규모 학교 8곳은 이 거점센터 학교와 공동으로 온라인 교육과정을 운영한다. 이에 더해 시교육청과 지자체, 대학과 유관기관을 한 데 묶은 고교학점제 선도지구(부산진·사하구)도 지정해, 해당 지역 고등학교를 지원할 예정이다.
이 같은 준비에도 불구하고 학교현장에선 고교학점제 전면도입을 앞두고 우려의 목소리가 나온다. 다양한 교과목을 운영하려면 과목당 최소 3명 이상의 교사가 필요하지만 1명에 불과한 경우가 많아, 교재연구와 평가·관리가 제대로 이뤄지기 어렵다고 호소한다.
학생들이 진로·적성에 따라 수업을 선택하도록 돕는 전문가도 필요하다. 동래고 이성진 교감은 “외국 학교는 학년별로 진로·진학 전문상담사가 있지만, 우리나라는 일반교사나 담임교사가 담당하는 실정”이라며 “단순히 교과목만 늘릴 게 아니라, 학생들이 자신의 진로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한 뒤 관련 교과목을 들을 수 있도록 진로·진학 컨설팅을 강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입시제도도 풀어야 할 과제다. 수능시험 중심의 정시를 확대하는 근래의 정책 기조는 고교학점제 취지와 엇박자가 날 수밖에 없다는 지적이다.
이대진 기자 djrhee@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