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병균 칼럼] 민주주의는 어떻게 농락당했나
논설위원
‘독일은 공화국이다. 국가 권력은 국민에게서 나온다.’ 1919년 제정된 독일 바이마르 헌법 제1조의 조항이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우리나라 헌법 제1조와 흡사하다. 이는 1948년 우리가 헌법을 만들 때 바이마르 헌법을 많이 참고했기 때문이다. 이 헌법은 독일 최초로 대통령제를 채택하고 자유와 인권에 대해 규정하는 등 근대적 헌법의 전형이 돼 현대 민주주의 발전에 큰 영향을 끼쳤다.
미국 역사학자 벤저민 카터 헷 뉴욕시립대 교수의 <히틀러를 선택한 나라>라는 저서가 있다. 바이마르 헌법에 기초해 오늘날 민주주의 제도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는 독일 민주주의가 왜 무너졌는지를 소개한 책이다. 저자는 다양한 형태의 현실 불만 세력과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정치인의 이기적인 음모가 결합된 민심이 히틀러라는 최악의 독재자를 선출했다고 말한다. 또 히틀러가 무법적이고 독단적으로 권력을 휘두르며 독일 국민을 불행으로 내몬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키는 과정에서 민주주의를 급격히 파괴했다는 게다. 민주주의는 얼마든지 민주적으로 붕괴할 수 있다는 교훈을 던진다.
히틀러 독재 탓 바이마르 헌법 실종
민주당 전횡에 ‘반민주적’ 비난 쇄도
다수당 힘 과시 편법·꼼수 동원 잦아
‘검수완박’ 입법 추진 강행이 대표적
정권 교체로 이어진 현실 직시해야
국민 눈높이에 맞는 정치 혁신 필요
이같이 뼈아픈 민주주의의 상처는 먼 나라 얘기거나 오래된 역사가 아니다. 국내에서도 집권당에 의해 버젓이 벌어지고 있는 실상이라고 표현하면 지나친 비약일까. 촛불 민심에 힘입어 탄생한 거대 여당 더불어민주당이 걸핏하면 절대다수 의석의 위력을 행사하며 안하무인격으로 독주해 온 행태가 그렇다. 국민보다 당리당략을 앞세워 온갖 편법을 동원해 민주주의를 능멸한 경우가 여러 차례다.
최근 들어 ‘검수완박’(검찰 수사권 완전 박탈) 법안을 입법화하겠다며 보여 준 무리한 폭주 행보가 대표적이다. 민주당은 국민의 삶에 막대한 영향을 주는 중대 입법인데도 국민 의견 수렴과 공감대 형성 같은 사전 절차를 묵살했다. 번갯불에 콩 볶듯 서둘러 마련한 법안이 허점투성이여서 부실하기 짝이 없지만, 4월 국회 처리를 강행하려고 들었다. 엄청난 부작용이 예상되는 졸속 법안이라고 지적한 각계의 반발과 반대 여론이 거세져도 의석수만 믿고 입법 추진을 밀어붙이려 한다. 문재인 정권의 각종 비위 의혹에 대한 검찰 수사를 원천 봉쇄할 속셈으로 의심될 정도다.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민주주의의 본질에 속하는 절차적 정의를 짓밟는 반민주적 폭거라는 비난이 무성한 이유다.
급기야 지난 22일 검수완박을 둘러싼 여야 간 충돌을 우려한 박병석 국회의장의 중재안이 나오기 직전에 민주당 민형배 의원이 위장 탈당하는 꼼수까지 등장했다. 민주당이 법안을 심사하는 국회 안건조정위원회의 무소속 몫까지 차지해 법안 처리에 속도를 낼 목적에서다. 오죽하면 당내에서도 비판이 쏟아지고 범여권인 정의당이 “의회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테러”라고 규탄했을까 싶다.
민주당은 2020년 12월에도 여권인 열린민주당 최강욱 의원을 야당 몫 안건조정위원으로 선임하는 방법 등으로 야당의 강한 반대를 뚫고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법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안건조정위는 여야가 대화와 타협을 통해 합의를 도출하자는 취지에서 최대 90일의 숙려기간을 두고 도입됐다. 민주당이 이를 입법 독주의 도구로 변질시키고 있는 셈이다. 앞서 2019년 12월 민주당은 공수처법 제정안과 준연동형 비례대표제 시행을 위한 공직선거법 개정안 처리를 위해 회기 끊어 가기 수법으로 제1 야당의 필리버스터(무제한 토론)를 강제로 무산시켰다. 특히 2020년 3월 위성정당인 더불어시민당을 창당해 스스로 만든 준연동형 비례대표제를 부정하기도 했다. 그때그때 정국에 따라 모순적인 태도를 드러낸 것이다.
이 모든 처사는 민주주의를 농락한 흑역사로 평가될 만하다. 민주화 운동에 기여했다고 자부하는 이들이 모인 민주당이 정작 정치 민주화에 역행해 대의 민주주의를 망치는 4류 수준 정치를 펼친 꼴이다. 당명과 전혀 어울리지 않게 비민주적인 모습이 아닐 수 없다. 3·9 대선에서 패배한 민주당은 다음 달 10일 새 대통령 취임과 동시에 야당의 위치로 돌아간다. 그동안 민의와 동떨어져 민주주의를 무시한 채 ‘내로남불’에 익숙한 정권 입맛에 따라 입법 횡포를 부린 결과임을 직시하고 반성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곧 출범할 윤석열 정권은 히틀러의 독재가 낳은 바이마르 민주주의의 죽음과 민주당의 전횡이 초래한 민주주의 위기를 반면교사로 삼을 일이다. 오로지 국민의 뜻에 관심을 두고 민주주의의 숭고한 가치를 실현해야 마땅하겠다. 이는 또한 여야 양쪽에 요구되는 덕목이다. 정상적인 국회 운영과 협치로 대의 민주주의 정신을 살려 나갈 때 국민의 신뢰와 지지는 저절로 뒤따르지 않겠는가. 높아진 국민 눈높이에 맞는 정치의 혁신이 절실하다. kbg@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