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물썰물] 여행용 캐리어

이병철 논설위원 peter@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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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시 수렵 채취 시대부터 인류에게 여행은 삶 그 자체였다. 인류의 먼 조상은 수백만 년에 걸쳐 아프리카 대륙으로부터 지구 곳곳으로 떠돌아다녔다. 농경 문화를 통해 인류는 정착하게 됐지만, 유목과 교역, 전쟁과 종교, 교육과 탐험 등 다양한 목적을 위해서 여행을 계속했다. 방랑의 유전자를 물려받은 인간은 ‘호모 비안스’(여행하는 사람)로 불린다. 꽉 짜인 현실을 떠나서 낯선 사람과 풍경, 낯선 음식과 문화 속으로 들어가는 묘한 흥분과 긴장은 여행의 묘미다. 우리 몸에는 여전히 여행자의 피가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근대적인 형태의 여행은 19세기 산업혁명과 더불어 철도와 증기 여객선 시대의 도래로 인류에게 보편적 문화로 정착했다. ‘집 떠나면 고생’이라고 누구나 되뇌지만, 그래도 여행의 최고 즐거움은 떠나기 직전 설레는 마음으로 여행가방을 꾸리면서부터 시작된다. 여행 전문가들도 ‘가방의 역사가 곧 여행의 역사’라고 곧잘 말하는 까닭이다.

이런 ‘떠남의 설렘’을 가득 담은 여행가방은 초기에는 나무로 만들어 무겁고, 바퀴도 없었다. 증기선이 보편화한 19세기에 배 침대칸 밑에 쏙 들어가는 납작한 형태로 바뀌었다. 이후 철도 시대에 여행가방은 기차 짐칸에 쉽게 올려놓을 수 있도록 손잡이가 달린 길고 평평한 형태로 개선됐다. 바퀴 달린 현대식 여행용 캐리어는 본격적인 해외여행 시대가 열린 1970년대에서야 등장했다. 최근에는 GPS 등 첨단기기가 탑재된 제품도 개발되고, 공항 패션의 마무리로까지 격상됐다.

코로나19 팬데믹 탓으로 지난 2년여 동안 집 장롱에 처박혀 있던 여행용 캐리어가 다시 햇볕을 쬐고 있다. 한국이 최근 ‘포스트 오미크론’에 따른 일상회복을 선포하면서 바야흐로 하늘길이 열리고 있기 때문이다. 억눌렸던 해외여행 수요가 폭발하면서 TV 홈쇼핑에서는 여행용 캐리어가 판매 방송 1시간 만에 3200여 개가 팔려 나갈 정도라고 한다.

하지만, 김해공항을 이용하는 부울경 시민은 조금은 더 참아야 할 듯하다. 정부가 5월부터 김해공항 국제선 노선을 승인했지만, 항공사들이 수익성을 이유로 미적거리면서 한 달 뒤에나 비행기를 투입할 예정이기 때문이다. 국제선 운항 노선 확대에 속도를 내는 인천공항과는 전혀 다른 상황이다. 좁은 공간에 격리됐던 갑갑한 기억으로부터 탈출해 다시 낯섦을 경험하려는 시민을 위해서도 하루빨리 하늘길, 바닷길이 열렸으면 좋겠다. 다만, 여행용 캐리어에 마스크와 손소독제는 챙기면서….


이병철 논설위원 peter@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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