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북 단상] 지방 아이들의 기울어진 운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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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 경제부 금융팀장

부산의 한 독자에게서 아침 일찍 전화가 왔다. <부산일보> 기사를 보다가 가슴이 막 뛰어 연락했다고 한다. 그를 들뜨게 한 기사는 ‘산업은행·수출입은행 동반 부산 이전 땐 폭발적 시너지’로 서울에 위치한 산은·수은이 부산으로 함께 이전하면 지역 균형 발전에 도움이 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는 통화하는 내내 ‘아이의 미래’를 여러 번 강조했다. 올 3월 첫째 아이가 태어나면서 부산, 수도권, 대한민국을 바라보는 시각이 많이 달라졌다고 한다. 그는 “두 은행이 이전하면 아이들은 좀 더 나은 부산에서 살 수 있다는 긍정적 느낌이 듭니다. 자녀가 태어나니 부산이 좀 더 풍성한 곳이 되면 좋겠습니다”고 말했다. 이제 막 태어난 아이의 미래를 그리는 그에게서 산은과 수은 이전에 대한 흥분과 기대감이 느껴졌다.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이 ‘산은·수은 부산 이전’ 공약을 꺼냈을 때 가장 큰 기대를 한 사람들은 부산 부모들이다. 이들은 막 미래를 꿈꾸기 시작한 어린 자녀의 모습을 떠올리며 산은과 수은과 관련한 작은 소식에도 큰 관심을 가진다.

이들 부모들은 대한민국의 ‘지방’에서 산다는 것이 아이들에게 어떤 의미인지 누구보다 잘 안다. 이미 ‘수도권’이라는 높은 벽 앞에서 ‘기울어진 운동장’, ‘출발선이 다른 경기’를 몸소 경험했다.

현재 부산은 사실상 ‘무늬만 제2의 도시’이다. 오죽하면 수도권에서는 그럴 듯한 기업 본사 하나 없는 부산을 덩치만 큰 ‘어촌’으로 바라볼까?

이렇다 보니 부산 아이들은 꿈을 위해 발버둥 치다가 결국 자본, 기업 그리고 행정이 밀집한 ‘힘’ 있는 수도권으로 빠져나간다. 실제, 부산을 포함해 동남권의 청년 유출은 전국에서 가장 심각하다. 지난해 말 기준 동남권에서 다른 지역으로 빠져나간 인구는 4만 6000여 명으로 이중 경제 활동의 중심인 청년층(20~39세)은 70% 정도를 차지한다.

부산 부모들은 자기 배를 채우기 위해 산은·수은의 이전을 반기는 것이 아니다. 다만, 아이들이 조금 더 덜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조금 더 비슷한 출발선에서 인생을 시작할 수 있다는 희망이 부모의 마음이다.

산은·수은의 이전은 분명 지역 균형 발전의 또 다른 마중물이 될 수 있다. 앞서 수도권의 반대 속에서 강행된 금융 공기업의 부산 이전은 지방에 대한 편견을 깨고 지역 균형 발전에 공헌한 선례로 남아 있다.

대한민국 아이들이 수도권이든 지방이든 어느 지역에서나 공정하게 경쟁할 수 있는 환경은 결국 대한민국의 경쟁력을 높이는 중요한 밑거름으로 작용한다. 아이들이 어디에서나 공정하게 경쟁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것은 현재 어른의 몫이다.

하퍼 리의 소설 <앵무새죽이기>에는 “그들은 그렇게 했어. 전에도 그랬고 오늘 밤도 그랬고, 앞으로도 또다시 그럴 거다. 그럴 때면 오직 애들만이 눈물을 흘리는 것 같구나”라는 구절이 있다.

어른들이 수도권 중심주의에 매몰돼 자기 밥그릇만 챙기려고 한다면 결국 지방 아이들은 기형적 사회에서 꿈을 포기하고 눈물을 흘릴 것이다. m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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