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예쁘고 소중한 카페, 그대로 문 닫게 둘 순 없었죠”
“서피랑 가서 장사하면 망한다? 그런 편견을 없애고 싶어요.”
‘홍등가’ 주홍글씨를 지우고 지역 명소로 거듭난 경남 통영시 서피랑에 ‘평범하지만 특별한’ 카페가 문 열었다.
‘서피랑을 그리다’ 1호점 ‘CAFE SEUL(카페 슬)’. 테이블 4개에 아기자기한 소품들로 채운 작은 공간이다. 은은한 조명이 분위기를 더한다. 하지만 남다르다고 할 만한 점은 눈에 띄지 않는다. 메뉴도 여느 카페와 같다. 대체 뭐가 특별한 걸까?
“굳이 꼽자면 소풍 바구니 대여 서비스? 그리고 마을 주민이 손잡고 폐업하려던 가게를 품었다는 것 정도랄까요.”
방문객 줄며 위기에 선 ‘카페 슬’
주민들, 협의회 꾸려 직접 인수
임시 운영하며 새 주인 찾기로
수익금 전액 지역사회 환원
대구에서 나고 자랐지만 스치듯 지나친 인연에 누구보다 통영을 사랑하게 됐다는 카페 주인장 정종남(52) 씨. 25년 전 시집 와 바다 내음에 끌려 정착한 곳이 항구와 맞닿은 서피랑이었다. 서피랑은 ‘서쪽 끝에 있는 높은 비랑(비탈의 지역 사투리)’이란 뜻으로 벽화 마을로 유명해진 동피랑을 마주하는 언덕배기다.
현대문학의 어머니 소설가 박경리 선생이 나고 자란 공간이자 세계적 음악가 윤이상 선생이 소학교를 다녔던 등굣길로, 천재 화가 이중섭이 한국전쟁 피란 시절 통영에 거주하며 작품을 완성한 곳이기도 하다.
그런데 1945년 해방 이후 뱃사람들을 상대로 한 가정집 형태의 윤락가로 변했다. 수산업 번성과 더불어 한때 호황을 누리기도 했지만 어업의 쇠퇴와 함께 내리막을 걸었고, 지금은 완전히 사라졌다.
그러나 이런 아픈 기억 탓에 지역민조차 접근을 꺼리는 낙후지역으로 방치됐다. 통영시는 2013년부터 마을 만들기 사업을 추진했고 지금은 동피랑과 함께 지역을 대표하는 명소로 자리매김했다.
서피랑을 찾는 방문객이 늘면서 새로운 상권도 형성됐다. 하지만 오래가지 못했다. 코로나19 장기화로 관광객 발길이 끊기면서 하나둘 문을 닫기 시작했다. 카페 슬도 그 중 하나였다. 어렵게 생긴 카페가 이대로 사라지는 게 못내 아쉬웠던 정 씨는 평소 봉사활동을 함께해 온 명정동새마을문고 회원들을 설득했다.
“가게를 비워 두면 왠지 죽은 동네 같고 여러모로 보기 안 좋잖아요. ‘이대론 안되겠다, 동네를 살리기 위해 뭔가 해야겠다’고 고민하던 차에 카페 사정을 들었죠. 일단 새 주인이 나타날 때까지 우리가 카페를 운영해 보자고 한거죠.”
그렇게 뜻을 같이하는 문고 회원과 주민 등 10명이 모였다. 마을을 더 예쁘게 꾸며보자는 뜻에서 ‘서피랑을 그리다’라는 운영협의회를 결성한 이들은 십시일반 비용을 마련해 카페를 인수했다. 현상 유지를 목표로 수익금은 전액 지역에 환원하기로 회칙에 못 박았다.
협의회는 당분간 카페를 직접 운영하다 카페 창업을 바라는 청년에게 맡겨 보기로 했다. 기본급에 매출의 일정액을 주는 조건으로 운영을 맡긴 뒤 카페 인수를 원하면 인계하는 것이다. 창업을 꿈꾸는 이들에겐 기회의 공간이 되는 셈이다.
정 씨는 “카페 슬이 우리가 생각한 골목상권 활성화의 첫 단추”라며 “카페가 새 주인을 찾으면 또 다른 폐점포를 인수하거나 새로운 아이템을 만들어 넘겨주는 방식으로 우리 스스로 상권 경쟁력을 키워나갈 생각”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서피랑이 제빛을 내도록 끝까지 해 보겠다”고 약속했다.
김민진 기자 mjkim@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