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숨비] “결혼하려다 해녀가 됐어”… 송도 해녀 강명순 이야기 #3-1
※‘부산숨비’는 제주도 밖 육지 해녀의 대명사인 부산 해녀를 기록하는 프로젝트입니다. 부산은 제주도 해녀들이 처음 출향 물질을 하며 정착한 곳이지만, 지난해 말 기준 60대 미만 부산 해녀는 20명 남았습니다. 인터뷰와 사료 발굴 등을 통해 사라져가는 부산 해녀의 삶과 문화를 기록하고, 물질에 동행해 ‘그들이 사는 세상’도 생생히 전달할 예정입니다. 제주도 해녀보다 관심이 적은 육지 해녀가 주목받는 계기로도 삼으려 합니다. 이번 기획 보도는 〈부산일보〉 지면, 온라인, 유튜브 채널 ‘부산일보’ 등 다양한 플랫폼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부산 서구 암남어촌계 - 강명순(72) 해녀 이야기>
결혼하려다 보니 제주도에서 ‘물질’을 배우고 있었다. 부산 송도에서 나고 자라 수영은 잘했지만, 해녀가 될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어린 시절 남편과 난 동네 ‘갑돌이’와 ‘갑순이’었다. 송도에서 아래윗집에 살았고, 한 살 차이라 친구처럼 지냈다. 남자는 ‘도둑놈’이라지 않는가. 자연스레 연애를 시작했다. 인물이 잘난 건 아니라도 마음씨가 참 예뻤다.
어느덧 ‘갑돌이’와 미래를 함께하기로 약속했다. 그런데 친정 반대가 너무 심했다. 방법을 찾아야 했다. 시댁 고향이자 식구가 있는 제주도로 무작정 가버렸다. 아가씨가 무슨 돈이 있나. 얼마 없는 반지랑 시계를 팔아 시고모 댁을 찾아갔다.
스물한 살이었다. 제주도 시고모 집에 살면서 물질을 배우게 됐고, 부산에 돌아와 30년 넘게 물질했다. 암남공원에 터전을 잡은 지는 한 50년 됐다.
■ 제주도에 간 송도 아가씨
당시 제주도는 혼자서 갔다. 남편과 시어머니는 부산 송도에 남았다. 주소가 적힌 종이 한 장 들고 무작정 시고모 댁으로 갔다. 그쪽 식구가 되기 위해 그렇게 해야 할 것 같았다. 그곳에 몸과 마음을 두고 지냈다.
물질을 배우려던 건 아니었다. 그런데 시고모도 시어머니처럼 해녀였다. 물에 뜨도록 ‘테왁’을 만들어달라고 했다. 잠수를 익히자 크게 어려울 건 없었다. 요령을 터득했더니 금방 실력이 늘었다. 제주도에서 물질하며 1년을 보냈다.
결국 부산에 있던 남편이 배를 타고 날 데리러 왔다. 송도에 도착해 큰아들을 가졌다. 그래서 2년 정도는 물질은 하지 않았다.
아들을 낳고 25살쯤 됐을 때였다. 제주도에서 배운 물질을 부산에서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식구가 10명이 넘었다. 시어머니 홀로 물질해 가족을 부양하는 게 너무 힘들어 보였다. 그래서 부산 바다에 뛰어들었고, 장사를 하며 ‘물건(해산물)’을 팔아 식구를 먹여 살렸다.
■ ‘아베크족’이 몰린 송도
20대 시절 송도 바다는 지금처럼 물이 깨끗했다. 좋은 물건은 더 많았다. 백합 조개, 전복, 소라, 멍게가 널려 있었다. 문어를 포함해 전부 다 있었다. 바닷물이 빠지면 바위틈에 해삼도 많았다.
자연산 전복도 잡았다. 그때는 양식이 없던 시절이었다. 우뭇가사리도 많이 했다. 이제는 돈이 안 되지만, 그때는 달랐다. 값을 많이 쳐주는 물건이었다.
물질은 시어머니랑 같이 다녔다. 시어머니가 바다에서 물건을 가져오면 내가 판매를 맡았다. 팔다가 남은 건 바닷물에 다시 보관했다. 당시에는 수족관이 없었다. 해산물을 소쿠리에 담아 그물을 씌운 뒤 바다에 던졌다.
지금은 포장마차 가게라도 있지만, 옛날에는 바다 주변에 앉아 먹었다. 당시 젊은 커플인 ‘아베크족’이 많이 놀러 왔다. 그때는 5000원 정도 받고 해산물 한 접시를 내줬다. 젊은 남녀들은 그냥 갯바위에 앉아 해산물을 먹곤 했다. 유람선을 타러 왔다 들른 손님도 꽤 있었다. 대야에 담아 판 해산물을 집까지 가져가는 사람도 있었다.
■ 60명에 이른 송도 해녀
해녀는 송도에도 많았다. 한 60명 정도가 물질을 다녔다. 당시에는 해녀들이 탄 낚싯배도 4~5대 있었다. 배에 5~6명이 타고 ‘머리섬(두도)’까지 물질하러 갔다.
고무 옷이 나오기 전에는 ‘속곳’이나 ‘물소중이’ 입고 물질했다. 서울에서 온 분이 내가 테왁 메고 있을 때 찍은 사진도 있었다. 여기저기 이사를 하다 보니 지금은 어딨는지 모르겠다.
송도해수욕장과 해상케이블카 탑승장 주변까지 곳곳에서 물질했다. 좋은 물건이 많아 보통 수심 3~5m까지 들어갔다. 욕심을 부린다고 깊게 들어가면 수압 때문에 귀가 아프다. 귀가 ‘찡’하면 바로 올라와야 한다.
상군이어도 항상 머리가 아팠다. 진통제 역할을 한 ‘뇌선’은 달고 살았다. 스텐트 시술을 받은 후로는 바다에 안 들어갔다. 물질 안 한 지는 10년이 더 넘었다.
한 번씩 물에 들어가고 싶다는 생각은 든다. 제 버릇 개 못 준다고 하지 않나. 아직도 테왁이랑 고무 옷은 그대로 가지고 있다. 저기 가면 전복 있고, 이쪽에는 해삼이 많고. 몸이 말을 안 들어서 그렇지 바닷속은 눈에 훤하다.
■ “해녀 하길 잘했지”
송도에서는 내가 막내다. 내 밑으로는 없다. 겨울에 춥고, 힘든 일인데 젊은 사람들이 하려고 할까. 제주도는 신규 해녀 모집을 활성화한다는 소리를 듣긴 했다. 우리는 송도 해녀를 알릴 만한 공간이라도 있으면 좋겠지만, 솔직히 구청에서는 탐탁지 않아 할 것 같다.
해녀를 안 했다면 내 인생은 어땠을까. 지금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알 수 없을 듯하다. 우리 영감 안 만났으면 두들겨 맞아 죽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당연히 자식 넷을 먹여 살리지도 못했을 테다. 내가 어디 가서 돈을 벌 수 있었을까. 물론 용돈 많이 못 주고, 맛있는 거 못 챙겨준 게 가슴 아프긴 하다. 그래도 물질로 애들 밥 먹이며 키웠다.
그래서 바다는 내게 참 소중한 곳이다. 진짜 소중하다. 송도에 케이블카나 구름다리가 만들어지고, 사람들이 많이 찾아오는 건 환영할 일이다.
하지만 송도 바다는 옛날보다 분명 오염됐고, 물건도 예전만 못하다. 그래서 해녀들은 나름 바다에 아무것도 안 버리려 노력 중이다. 송도도 속이 훤히 보이는 제주도나 외국처럼 바다가 한층 나아졌으면 한다. 가족을 먹여 살린 소중한 바다가 늘 깨끗하길 바랄 뿐이다.
※강명순 해녀 이야기는 인터뷰 내용에 기반해 1인칭 시점으로 정리했습니다. 인터뷰 원본은 기사 위쪽 영상과 유튜브 ‘부산일보’ 채널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장병진 기자 joyful@busan.com , 남형욱 기자 thoth@busan.com , 이우영 기자 verdad@busan.com , 서유리 기자 yool@busan.com , 정수원 PD blueskyda2@busan.com , 정윤혁 PD jyh6873@busan.com , 이지민 에디터 mingmini@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