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숨비] “자식들 키우러 부산에 왔지”… 남천 해녀 강순희 이야기 #4-1
※‘부산숨비’는 제주도 밖 육지 해녀의 대명사인 부산 해녀를 기록하는 프로젝트입니다. 부산은 제주도 해녀들이 처음 출향 물질을 하며 정착한 곳이지만, 지난해 말 기준 60대 미만 부산 해녀는 20명 남았습니다. 인터뷰와 사료 발굴 등을 통해 사라져가는 부산 해녀의 삶과 문화를 기록하고, 물질에 동행해 ‘그들이 사는 세상’도 생생히 전달할 예정입니다. 제주도 해녀보다 관심이 적은 육지 해녀가 주목받는 계기로도 삼으려 합니다. 이번 기획 보도는 〈부산일보〉 지면, 온라인, 유튜브 채널 ‘부산일보’ 등 다양한 플랫폼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부산 수영구 남천어촌계 - 강순희(75) 해녀 이야기>
아이들이 나처럼 사는 게 싫었다. 자식들 키우려고 제주도를 떠났다. 부산 영도구에 살다가 남천동으로 이사했다. 물질은 그만할 줄 알았는데 여기에도 바다가 있었다. 그래서 지금까지 남천동 앞바다를 누비고 있다.
제주도 성산포 앞 ‘우도’에서 태어났다. 해녀가 된 건 14살. 당시 돈이 된 미역과 우뭇가사리를 주로 가지고 나왔다. 그렇게 해야 쌀 한 되 받아오거나 고구마 하나를 먹을 수 있었다.
전깃불과 나무가 없고, 마실 물도 넉넉지 않던 시절을 보냈다. 경북이나 충청 지역까지 가서 물질하기도 했다. 그러다 스물셋에 결혼했다. 부산에 정착한 후에도 물질을 꾸준히 했다.
수십 년을 함께한 남천동 앞바다는 부모 같은 존재다. 자식들 배불리 먹일 ‘집념’으로 물질하면 ‘잡념’이 없어진다. 숨이 안 가쁘고 걸을 수 있다면 계속 바다에 들어가고 싶다.
■ 자식을 위한 ‘부산행’
스물셋에 시집갔을 때 남편은 변변한 일자리가 없었다. 제주도에 남자들이 다닐 큰 직장이 없던 시절이었다. 돈을 벌어야 했다. 스물넷에 경북 대보(포항 호미곶면)로 가서 1년 정도 물질했다. 이듬해에도 그곳을 찾았다.
제주도 우도에 남편과 둘이 사는 건 괜찮았다. 하지만 자식들 생각하면 계속 이렇게 살 수 없었다. 아이들이 우리처럼 사는 걸 바라지 않았다.
스물여섯에 남편과 부산으로 터전을 옮겼다. 영도구 청학동에 10년 넘게 살았다. 월세 4000원짜리 작은 단칸방을 얻어 살림을 꾸렸다. 한국해양대 앞에서 물질하며 먹고 살았다.
그렇게 삼 남매를 키웠다. 하지만 영도에 계속 살기는 어려웠다. 몸이 불편한 아이를 생각해 이사하기로 했다. 그래서 정착하게 된 곳이 남천동이다. 내가 30대 중반 때였다.
■ 바다가 있던 남천동
남천동에 바다가 있는 줄 몰랐다. 영도에만 살다 보니 부산 길도 잘 모르던 시절이었다. 자식들만 생각하고 이곳에 왔다. 그런데 시장에 가보니 해녀들이 ‘물건(해산물)’을 팔았다. 좌판에 해삼과 소라가 깔려 있었다.
결국 물질을 하기로 했다. 형편이 넉넉지 않던 시절이었다. 남편이 버는 돈으로는 자식들 병원비랑 교육비를 마련하긴 어려웠다. 살려면 배운 기술을 써먹어야겠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남천동 해녀 언니들이 많은 도움을 줬다. 큰 설움 없이 먹고 살 수 있었다. 아이들 착실히 잘 키울 정도는 됐다. 바다에 들어갔다가 학교 수업 마친 아이를 데리러 가기도 했다.
남천동에 해녀가 많을 때는 22명이었다. 지금은 다섯 남았다. 처음에는 텃세도 있었다. 그래도 언니들이 약값 벌면서 아이들 먹여 살려야 하는 내게 마음을 열어줬다. 시장에서도 상인들이 물건을 발로 차고 엎던 적도 있었다. 물론 지금은 그런 게 없다.
■ 멍게가 많았던 광안대교
남천동 앞바다에도 온갖 물건이 많았다. 전복, 소라, 해삼, 성게, 문어, 고둥, 홍합, 군소, 미역. 안 나오는 게 없을 정도였다. 지금도 물건이 있지만, 환경 문제 때문인지 옛날만큼은 없다. 그래도 몇 안 남은 해녀들이 먹고살기는 괜찮을 정도다.
남천동 해녀들은 오전 7시 반 정도에 남천항 탈의실에 나온다. 조금 쉬면서 이바구(이야기)를 나누고, 커피도 한잔하다 8시 반쯤 잠수복으로 갈아입는다. 그러다 물에 들어가는데 나오는 건 낮 12시에서 오후 2~3시까지 모두 다르다.
처음에는 남천동에 탈의실도 없었다. 작은 세면 공간 하나 있었다. 물에 들어갔다 오면 거기서 모닥불 피우고 옷을 갈아입었다.
어느 순간 남천항 끝에 작은 탈의실이 하나 생겼다. 모닥불을 보고 다가온 행인이 아마 부산시에 얘기를 해준 듯하다. 지금은 가스보일러가 설치돼 따뜻한 물도 나온다. 난로도 있어서 잘 사용하고 있다. 수협과 어촌계가 도움을 준 덕이다.
난 물질을 잘하는 ‘상군’에 속해 가장 늦게 나온다. 지금도 광안대교 아래까지 들어갔다 나온다. 예전에는 광안대교 교각에 멍게가 엄청 많았다. 한 번 물질하면 200~300kg씩 갖고 나왔다.
광안리해수욕장 주변까지 걸어가서 물질한 적도 있다. 그런데 이제는 납을 차면 몸이 무거워서 걸어가질 못한다. 해수욕장까지 택시를 타고 간 적도 있지만, 예전만큼 몸이 따라주지 않는다.
해산물이 지금보다 그득했고, 건강했던 우리가 물건을 많이 건진 건 이제 옛 이야기다. 우리처럼 바다도 늙어가는 건지 물건도 예전만큼 없다.
■“집념으로 물질하면 잡념이 사라져”
부산 남천동에 정착한 이후 다른 바다에서 물질한 적은 없다. 광안리해수욕장 근처까지만 갔을 뿐 이곳 바다에만 40년가량 있었다.
남천동 앞바다는 부모 같다. 어느 부모가 매일 찾아간다고 돈을 그리 주겠나. 먹고 살게 해줘서 늘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 어떨 때는 부모한테 재산을 받아오는 느낌이다.
바다에 들어가면 걱정이나 시름이 없어진다. 물건 하나씩 갖고 나와 아이들 배불리 먹이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런 집념을 갖고 물질하면 잡념이 사라진다.
아직 한 달 기준 15~20일 정도 물질한다. 예전에 몸을 많이 쓰다 보니 지금도 병을 달고 산다. 귀도 잘 안 들리고 호흡도 달린다. 허리가 삐끗해 바다에 못 나갈 때도 있다. 그럴 때는 마음이 불편하다. 답답해서 일찍 바다에 돌아가려고 애쓴다.
옛날처럼 욕심은 많이 없다. 그래도 물질은 꾸준히 하고 싶다. 건강이 허락하면 적어도 여든까지는 바다에 가고 싶다. 할 수 있을 때까지 하려고 한다. 호흡이 안 달리고 걸을 수만 있다면 바다와 함께 살고 싶다.
※강순희 해녀 이야기는 인터뷰 내용에 기반해 1인칭 시점으로 정리했습니다. 인터뷰 원본은 기사 위쪽 영상과 유튜브 ‘부산일보’ 채널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장병진 기자 joyful@busan.com , 이우영 기자 verdad@busan.com , 남형욱 기자 thoth@busan.com , 서유리 기자 yool@busan.com , 정수원 PD blueskyda2@busan.com , 정윤혁 PD jyh6873@busan.com , 이지민 에디터 mingmini@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