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사람들이 욕본데이~” 믹스커피 7잔에 담은 왕할머니 마음 [산복빨래방] EP2.

김준용 기자 jundragon@busan.com , 이상배 기자 sangbae@busan.com , 이재화 jhlee@busan.com , 김보경 harufor@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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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복빨래방 EP2.] 뜨거운 커피 한잔에 녹아있던 왕할머니의 마음

안녕하세요, 산복빨래방입니다. 산복빨래방은 부산 근현대사의 질곡을 담은 산복도로에서 살아가는 우리네 이웃들의 이야기를 듣는 공간입니다. 자그마한 빨래방이 주민들의 '소통 공간'이자 '힐링 공간'이 되는 게 목표이자 바람입니다. 부산만이 가진 '부산의 이야기'를 진솔하게 전하겠습니다.


■커피 한 잔


빨래가 쌓이고 있습니다. 당일 세탁, 당일 건조 약속은 못지키고 있지만 다행히 아직 '컴플레인'은 없네요 빨래가 쌓이고 있습니다. 당일 세탁, 당일 건조 약속은 못지키고 있지만 다행히 아직 '컴플레인'은 없네요

산복빨래방 세탁기 앞에 빨랫감이 잔뜩 쌓였습니다. 그만큼 어머님, 아버님이 들려주시는 산복 이야기도 시나브로 늘어나고 있습니다.

지난 겨울, 두꺼운 패딩을 껴입고 회사 책상에 앉아 문득 상상했습니다. “산복도로에 빨래방을 열면 어떨까?”. 막연히 어머님, 아버님들 이야기를 듣는 게 재밌을 것 같았습니다. 어느덧 날씨는 무더워졌고, 상상은 현실이 됐습니다. 힘들고 지칠 때도 있지만 산복도로는 '여기에 오길 잘했구나'는 생각이 하루에 수차례 들게 하는 매력적인 장소입니다.


왕할머니와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기분이 좋아집니다. 왕할머니와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기분이 좋아집니다.

 빨래방이 있는 호천마을 18통에는 ‘왕성님’이 있습니다. 빨래방 직원끼리는 ‘왕할머니’라고 부르지만 어머님들 사이에선 성님(‘형님’의 사투리)입니다. 왕할머니는 올해로 나이가 85세입니다. “어머니, 정정하신 비결이 뭡니까?”라는 저의 우문에 “뭐이 정정해, 고마 안 아픈 데가 없지. 근데 안 아픈 게 자식들 돕는 기라”라고 현답을 합니다. 왕할머니가 빨래방에 있는 동안 할머니의 휴대전화가 쉴 새 없이 울려댑니다. “성님, 어뎁니까? 여기 한번 놀러 오이소.” 왕할머니를 찾는 전화입니다. “누구한테 오는 전화입니까?”하고 물으면 “내 없으면 재미없다 안 카나, 가봐야 한다. 아이고, 허허허” 하고 호탕한 웃음을 짓습니다.


왕할머니는 1주일이 스케줄로 빼곡 차 있습니다. 매일 아침 노인 일자리도 가고 마을 동생들과 꽃그림(?) 놀이도 합니다. 왕할머니는 왕성님이라고 불리는 걸 싫어합니다. 나이 들어 보이는 게 싫답니다. 왕성님인 만큼 크게 ‘한턱’ 내야 하는 자리도 많지만 마다하는 법은 없습니다. 걸려 온 전화에 다음 마실 장소로 이동하는 왕할머니는 빨래방을 떠나갈 때 항상 ‘우리 손주들 수고해, 욕본다’라는 말을 잊지 않습니다.

“촌에서 와서 고구매도 숭구고, 강냉이도 숭구고, 연탄도 이다 나르고 안 해 본 일이 없다. 근데 이 동네 사람들 다 안 그렇나.”

왕할머니는 1남 4녀를 모두 호천마을에서 키웠습니다. 젊을 때 경남 고성에서 시댁 식구들이 있는 호천마을로 와서 안 해 본 일이 없답니다. 왕할머니는 손자, 손녀들 이야기를 할 때 가장 환하게 웃습니다. “어버이날 때 손자들이 ‘우리 할매가 업어 키웠다’며 용돈 주더라”고 이야기를 할 때는 영락없는 손자 바보입니다.


왕할머니 특유의 바이브레이션을 듣고 있으면 가사와 박자를 떠나 기분이 이상해집니다. 왕할머니 특유의 바이브레이션을 듣고 있으면 가사와 박자를 떠나 기분이 이상해집니다.

 왕할머니는 손자 이야기를 하다 기분이 좋아졌는지 손자 같은 저를 부둥켜안고 “한 곡 뽑아 볼까?”라며 목을 가다듬습니다. “안 오는 건지 못 오는 건지 안타까운 내 마음만 녹고 녹는다. 기적소리 끊어진 밤에~(안동역에서).” 무반주로 빨래방을 가득 채운 왕할머니의 곡조. 그냥 자주 듣는 트로트인데 왜 기분이 이상해지는 걸까요? 노래를 좋아하는 외할머니 생각도 문득 납니다. ‘각시 때 목청이 지붕을 날렸다’는 왕할머니의 말은 사실인 것 같습니다.


커피 잘 마셨습니다 할머니. '빨래방 하길 잘했다'고 생각하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커피 잘 마셨습니다 할머니. '빨래방 하길 잘했다'고 생각하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왕할머니는 빨래방 식구들이 처음 만난 마을 주민이기도합니다. 지난달 폐가를 빨래방으로 고치기 위한 공사가 한창이던 어느 날. 곰팡이 가득한 폐가, 휘날리는 분진 속에 막막함만 더해지던 때였습니다. 저 멀리서 왕할머니가 한 손으로는 벽을 짚고 한 손에는 쟁반을 든 채로 걸어오는 게 보였습니다. 쟁반 위에 있는 건 믹스커피 7잔. “젊은 사람들이 고생하는데 줄 건 없고…. 먹고 해, 얼음 하나 쓱 넣었다”라며 ‘툭’ 쟁반을 놓고 갔습니다. 흔히 도시에서는 옆집에서 공사를 시작하면 작은 다툼이 벌어지거나 언성이 높아지기도 합니다. 공사를 하는데 이웃집에서 커피를 타 준다는 건 상상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뜨거운 날씨였지만 커피는 어떤 커피보다 시원하고 달았습니다. 왕할머니는 그렇게 우리를 품었습니다. 우리는 이웃이 됐습니다.


세탁기 뒷벽 타일 셀프 시공 도전

계단으로 자재 옮기기부터 땀범벅

시끄러운 공사 소음 아랑곳없이

커피 7잔 무심하게 건넨 할머니


일주일 일정 빡빡한 ‘마을 핵인싸’

빨래방 직원들 첫 인연·인생 선배


어르신 대접하겠다며 시작했지만

주민들 덕에 빨래방 직원 성장 중



■셀프 시공

 “김 기자, 인부 여럿 지금 도망갔다.”

 빨래방 공사를 돕는 인테리어 대표님이 농담 반, 진담 반으로 건넨 말입니다. 폐가를 빨래방으로 바꾸는 가장 큰 난관은 바로 계단이었습니다. 각종 건축 자재와 집을 부순 폐자재가 계단을 오가야 한다는 건 고된 노동력이 필요하다는 뜻이었습니다. 고된 노동은 비싼 인건비를 의미했습니다.


집이 부서지는걸 보면서 걱정이 앞섰습니다. '잘 고쳐질까 이 집이?' 집이 부서지는걸 보면서 걱정이 앞섰습니다. '잘 고쳐질까 이 집이?'

아무리 회돈회산(회사돈으로 회사가 산 것)이지만 아껴야 했습니다. 예쁜 디자인, 깔끔한 디자인을 찾다 보니 비용 문제도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고민 끝에 호기롭게 세탁기 뒷벽 타일 공사를 직접 해보기로 했습니다. 저렴하게 세탁 공간임을 강조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초등학교 미술 시간에 찰흙 만지기 이후로 만들기를 그만뒀던 '똥손'으로 부산 강서구 타일 매장을 찾아갔습니다. 세상 만물 최고 선생님은 '유튜브'죠. 유튜브를 통해 '셀프 타일 시공' 'DIY 시공'이라는 단어로 영상을 숱하게 학습했습니다. 10분 남짓한 영상에 담긴 타일 공사는 매우 쉬워 보였습니다. 본드를 뿌리고 펴 바른 다음에 타일을 붙이고 백시멘트로 빈 곳을 메꾸는 매우 단순한 작업이었습니다.


유튜브로 볼 때는 엄청 쉬워보였습니다. 셀프 인테리어 하시는 분들 존경합니다. 유튜브로 볼 때는 엄청 쉬워보였습니다. 셀프 인테리어 하시는 분들 존경합니다.
오와 열을 맞춰 붙이는 건 쉬워보이지만 엄청난 집중력을 필요로합니다. 오와 열을 맞춰 붙이는 건 쉬워보이지만 엄청난 집중력을 필요로합니다.

빨래방까지 큰 도로에서 최단 거리인 63칸의 계단으로 직접 20kg 백시멘트와 접착제, 타일 6상자 100여 장을 옮겼습니다. 계단에서 빨래방까지 옮기기만 했는데도 옷이 땀으로 젖기 시작했습니다. 바로 깨달았습니다. ‘아, 이래서 다들 도망가셨구나.’

 타일 셀프 인테리어의 시작은 벽에 접착제를 뿌리고 접착제를 펴 바르는 것부터가 시작이었습니다. 매우 낯설었습니다. 접착제가 평평히 펴지지 않으면 기껏 붙여 놓은 타일이 들썩입니다. 전문가들은 1시간이면 한다는 벽 한 칸 타일 시공은 반나절이 넘게 걸렸습니다. 그렇게 빨래방의 가장 중요한 시설인 세탁기 뒷벽에는 칸칸이 타일이 붙었습니다. 가끔 어머님, 아버님들이 ‘타일도 해 놓고 할 건 다 했네’ 하실 때 기다렸다는 듯 셀프 시공 뒷이야기를 풀어놓곤 합니다. (해놓고 보니 깨달은 사실인데, 대형 세탁기에 가려 타일 3분의 2가량은 잘 보이지 않습니다.)


다 해놓고 나면 뿌듯할 줄 알았는데.. 세탁기가 타일을 가리는 건 우리 '경우의 수'에는 없었습니다. 다 해놓고 나면 뿌듯할 줄 알았는데.. 세탁기가 타일을 가리는 건 우리 '경우의 수'에는 없었습니다.

 신문사에서 2000만 원을 투자해서 산골 마을에 빨래방을 지었다는 이야기는 모두에게 신기한가 봅니다. 빨래방 직원들은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하루에도 몇 번씩 걱정과 부담을 느끼곤 합니다. 괜히 시작했다는 두려움까지 듭니다. 그럴 때마다 저희를 붙잡아주고 저희를 북돋아 주는 건 바로 산복빨래방의 고객이자 이야기꾼인 어머님, 아버님들입니다. 어머님, 아버님을 마주하는 일은 하루하루가 신기한 배움의 순간들입니다. 보자기 매듭짓는 법, 떡 한 되 값 등등 모르는 것들이 너무 많습니다. 공사로 시끄럽게 했을 젊은이들에게 커피를 건네는 왕할머니의 배려심은 어디서도 못 배울 마음입니다. 마을 주민들은 인생의 연륜, 따뜻함으로 우리를 돌보고 보듬고 있습니다

왕할머니가 빨래방에 올 때마다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다 덤으로 사는 기다"입니다. 서로서로 인생에 조금씩 덤을 보태서 살아나간다는 의미인 것 같습니다. "인생 서로 덤으로 사는 거라"는 왕할머니 말처럼 마을과 산복빨래방은 서로 덤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어머님들은 사진 찍는걸 좋아합니다. 앞으로도 사진 많이 찍어요 우리. 어머님들은 사진 찍는걸 좋아합니다. 앞으로도 사진 많이 찍어요 우리.

*P.S 산복빨래방은 마을의 유일한 시내버스인 87번 부산진구 범천동 호천마을 정류장에서 계단을 내려오면 만날 수 있습니다.

운영시간은 오전 10시부터 오후 6시까지이고, 주말과 공휴일은 쉬고 있습니다. 대형 23kg 세탁기 2대와 건조기 2대가 쉴 새 없이 작동 중입니다. 세제와 섬유유연제는 제공되고 무료로 운영되니 편하게 빨랫감만 들고 찾아오시면 됩니다.

산복도로의 진짜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거나 빨래방이 궁금하시다면 언제든지 찾아주세요. 직접 찾아오시기 전 네이버나 유튜브, 인스타그램 부산일보 채널과 검색창에 ‘산복빨래방’을 검색하셔도 산복빨래방의 진짜 이야기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다음 화에는 호천마을 어머님들의 건강 비결을 살짝 공개하도록 하겠습니다. 이분들이 계단 가득한 마을을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시는 데는 다 이유가 있었습니다.


※본 취재는 부산광역시 지역신문발전지원보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김준용 기자 jundragon@busan.com , 이상배 기자 sangbae@busan.com , 이재화 jhlee@busan.com , 김보경 harufor@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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