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숨비] “운동회 못 따라간 게 한이 됐어”… 용당 해녀 이순자 이야기 #5-1
※‘부산숨비’는 제주도 밖 육지 해녀의 대명사인 부산 해녀를 기록하는 프로젝트입니다. 부산은 제주도 해녀들이 처음 출향 물질을 하며 정착한 곳이지만, 지난해 말 기준 60대 미만 부산 해녀는 20명 남았습니다. 인터뷰와 사료 발굴 등을 통해 사라져가는 부산 해녀의 삶과 문화를 기록하고, 물질에 동행해 ‘그들이 사는 세상’도 생생히 전달할 예정입니다. 제주도 해녀보다 관심이 적은 육지 해녀가 주목받는 계기로도 삼으려 합니다. 이번 기획 보도는 〈부산일보〉 지면, 온라인, 유튜브 채널 ‘부산일보’ 등 다양한 플랫폼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부산 남구 옛 용당어촌계 - 이순자(76) 해녀 이야기>
바다가 사라졌다. 추억이 깃든 모든 곳이 매립됐다. 인근 용호동 백운포로 터전을 옮겼다. 같이 물질한 언니들은 세상을 떠났고, 난 마지막 ‘용당 해녀’가 됐다.
부산 바다에서 한 50년 물질했다. 사라진 옛 용당 바다가 좋았다. 수심이 얕고 ‘물건(해산물)’이 많은 곳이었다. 고무 잠수복이 없던 시절 해녀 수십 명이 누빈 바다였다.
물질밖에 모르고 살았다. 바다에 가느라 아이들 운동회 한 번 못 가봤다. 그게 한이 됐지만, 친정 같은 바다 덕에 살 수 있었다. 용왕님이 주는 만큼 물건을 건졌고, 정직하게 노력하며 살았다고 자부한다.
■ 생업이 된 놀이
내 고향은 제주시 구좌읍 김녕리. 어린 시절 자연스레 물질을 배웠다. 엄마 따라 미역 따러 가고 그랬다. 딱히 돈 벌려고 바다에 간 건 아니었다. 해수욕하면서 수영을 익혔고, 고둥 같은 거 잡아먹으며 놀았다.
학교 점심시간에 밥을 거르고 바다에 가곤 했다. 수영하면서 놀다 나오면 머리에서 물이 줄줄 흘렀다. 교실에 돌아가면 선생님께 맞고 그랬던 기억이 난다. 수영을 못한 여동생 2명을 집에 놔둔 채 바다에 간 적도 있다.
제주도에서 물질을 자주 한 건 아니었다. 농사짓는 걸 많이 거들었다. 철마다 미역을 따서 팔았던 정도였다.
그러다 열아홉이 됐다. 일본에서 일하려 했는데 계획이 틀어졌다. 부산으로 건너가 뱃일하는 남편을 만났다. 용당동에 넘어온 건 24살. 여기서 사는 건 생각보다 빡빡했다. 사촌 언니가 바다에 가는 게 친정에서 얻어오는 것보다 낫다더라. 그래서 물질을 시작했다.
■ 부산에서 군산까지
용당 앞바다는 수심이 얕았고 물건이 많았다. 개조개와 바지락도 널려 있었다. 전복도 많이 잡혔다. 미역이나 성게뿐 아니라 가을에는 말똥성게(앙장구) 잡아서 자갈치에 갖다주곤 했다.
1970년대 용당동에 처음 왔을 때는 해녀가 27~28명 정도였다. 다 제주 출신이었고, 육지 사람은 없었다. 그때는 고무 잠수복도 안 입었다. 얇은 ‘물소중이’나 ‘속곳’ 입고 한 30분씩 들어갔다 나왔다 했다.
뱃물질은 하진 않았다. 갯물질을 해도 젊은 해녀는 깊게 잠수했고, 나이 많은 이들은 가쪽에서 미역을 뜯거나 톳을 땄다. 그때는 지금처럼 해삼 같은 것도 안 잡았다. 사람들이 먹을 거라 생각 못했다.
어느덧 용당어촌계 소속 해녀는 15명까지 줄기도 했다. 나이가 많아 물질을 못 하거나 돌아가신 해녀도 있었다.
부산 밖 다른 지역까지 물질을 떠났다. 남해나 여수뿐만 아니라 군산까지 다녀왔다. 남해에서는 한 3~4년 정도 물질했고, 한 달에 20일은 거기서 머물렀다. 군산은 매달 백만 원씩 준다고 해서 두 달 정도 다녀왔다. 이때는 해삼을 잡았다.
모두 해녀가 부족한 곳이었다. 남해에서는 우리가 2~3, 그쪽이 7~8을 가져가는 구조였다. 참 독하다고 생각했는데 그래도 워낙 물건이 많이 잡혀 돈벌이가 됐다.
■ 사라진 용당 바다
용당동 인근 바다는 물건이 점차 줄기 시작했다. 다른 지역을 찾아 물질한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원인은 명확했다. 우리가 누볐던 용당 앞바다가 매립되기 시작해서다.
내가 살던 동네는 옛 ‘극동석유’ 인근이었다. 안쪽에 미역을 따던 바다가 매립되며 사라졌다. 용당동 앞바다는 신선대 컨테이너 부두로 대체됐다. 넓은 바다가 없어졌다.
결국 용당어촌계는 1990년대에 해산됐다. 선주는 다른 어촌계로 옮겨갔고, 배를 팔기도 했다. 젊은 해녀들은 물질을 그만뒀다. 해녀 5명이 남았는데 2명도 결국 떠났다.
언니 2명과 함께 인근 용호동 바다에 정착했다. 셋이 백운포 앞바다를 누볐다. 오륙도 가는 방향에 자갈밭이 있는데 그 일대에서 물질했다. 바다가 예전만큼 깨끗하진 않아도 아직도 물건이 꽤 있는 곳이다.
그러다 10여 년 전 언니 1명이 교통사고로 돌아가셨다. 약 5년 전에는 같이 물질했던 사촌언니가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마지막 ‘용당 해녀’가 된 난 홀로 바다에서 물질해왔다.
■ 가슴에 남은 운동회
한 50년을 바다와 함께했다. 물질밖에 모르고 살았다. 그래야 돈을 벌 수 있었다. 아이 넷을 키우려면 어쩔 수 없었다.
그러다 보니 아이들 운동회를 한 번도 못 가봤다. 이모들이 대신 따라갔다. 김밥이나 싸줬지, 짜장면 한 그릇 못 사줬다. 그때 얼마 하지도 않았는데…. 아이들 소풍도 마찬가지였다. 맛있는 밥 한 번 못 사줬다.
그게 한이 된다. TV에서 아이들이 운동회 때 뭘 사는 장면을 보면 그때가 자꾸 떠올랐다. 막내가 “엄마 넘어간 일을 왜 그렇게 신경 써? 우리 다 잘 컸잖아”라고 해도 아무것도 못 해준 게 계속 생각난다.
그때는 바다에 꼭 나가야 했다. 이상하게 바다에 안 나가면 죽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내가 오늘 벌지 않으면 죽는다고 생각했다. 나만 그런 게 아니라 하루라도 물질을 빠지지 않으려는 해녀가 많았다.
정작 바다에 가도 파도가 높거나 물이 어두운 날도 있었다. 그냥 ‘아이들 따라갈 걸 그랬다’고 생각하며 돌아온다. 부모랑 같이 간 아이들은 행복했겠지만, 우리 새끼들은 울면서 운동회 갔다는 생각에 마음이 아프다. 그런 날은 바다에 들어가도 눈물이 났다.
■ 친정 같은 바다 곁에
올해는 바다에 한 번도 들어가지 않았다. 지난해 6월 이후 물질을 못 했다. 몸이 더 이상 안 따라준다. 해녀들이 잡아 온 물건을 보면 들어가고 싶긴 하다. 그래도 혹시 실수할까 봐 물질을 삼가고 있다.
갑상선을 포함해 몸이 예전 같진 않다. 진통제인 ‘뇌선’은 하루 한 봉은 먹어야 머리가 안 아프다. 물이 따뜻해지면 7~10일 정도 홍합 잡으러 가는데 올해는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바다에서는 욕심을 부리면 안 된다. 용왕님이 주는 대로 물건을 가져오려 한다. 빈 망태기 들고나와도 운명이라고 받아들인다. 다른 해녀가 물건 많이 건져와도 부러워하지 않으려 했다.
더 이상 물질은 안 해도 친정 같은 바닷가에 계속 머물려고 한다. 엄마가 만 원짜리 한 장 주듯 물건을 내어준 고마운 바다다. 해녀가 됐기에 정직하게 노력하며 살아올 수 있었던 것 같다. 그 시간이 자랑스럽다.
※이순자 해녀 이야기는 인터뷰 내용에 기반해 1인칭 시점으로 정리했습니다. 인터뷰 원본은 기사 위쪽 영상과 유튜브 ‘부산일보’ 채널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장병진 기자 joyful@busan.com , 이우영 기자 verdad@busan.com , 남형욱 기자 thoth@busan.com , 서유리 기자 yool@busan.com , 정수원 PD blueskyda2@busan.com , 정윤혁 PD jyh6873@busan.com , 이지민 에디터 mingmini@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