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 늘 몸 건강히 즐겁게 사세요” 송해가 마지막 인터뷰서 전한 당부
2020년 ‘송해 1927’로 BIFF 참석
영화 상영·관객과 만난 뒤 함박웃음
“마음 아파하지 말고, 늘 즐겁게 사세요”
“인생이 평탄하게 마음대로 흘러가는 건 아닙니다. 괴롭고 힘든 일을 겪을 땐 혼자 끙끙대지 말고 사람들과 같이 나눠야 해요. 작은 일에 마음 아파하지 말고, 늘 몸 건강히 즐겁게 사셨으면 좋겠습니다.”
이제는 고인이 된 방송인 송해는 2020년 10월의 어느 날 부산국제영화제(BIFF)를 찾았다. 부산 출신 윤재호 감독이 메가폰을 잡은 다큐멘터리 영화 ‘송해 1927’로 관객을 만나기 위해서다. 구순이 넘는 나이에도 첫 주연작의 관객을 만나기 위해 서울에서 장장 6시간을 달려와 무대에 섰다. 관객과 대화를 나눈 뒤 <부산일보>와 만난 그가 “누가 뭐래도 내가 최고상을 탄 것 같다”며 함박웃음을 지었던 모습이 아직도 선명하다.
고인은 영화 촬영 시에도 후배들의 귀감을 샀다. 당시 영화 제작을 했던 이기남 PD는 9일 <부산일보>에 “일에 대한 열정이 대단하신 분이었다”며 “한번 결정하신 일은 철저하게 준비하고 직진하는 스타일이셨다”고 고인을 회고했다. 그는 “영화 촬영을 시작할 때 큰 어른이셔서 긴장을 많이 했는데 예쁘게 봐주셨다”며 “현장에서도 감독님이나 저에게 해보고 싶은 걸 해보라고 기회를 많이 주셨다”고 전했다.
이 PD는 “선생님을 옆에서 보면서 삶과 일에 대해 많이 배웠다”며 “작은 것 하나도 놓치지 않고 기억하셨다가 농담도 던지시는 걸 보고 정말 프로라는 걸 느끼기도 했다”고 했다. 그는 “국민들이 송해 선생님을 많이 사랑했으니, 그 사랑 안고 좋은 곳으로 가셨으면 한다”고 추모했다.
송해는 8일 오전 서울 강남구 도곡동의 자택에서 하늘 소풍을 떠났다. 향년 95세. 2020년 가을 있었던 방송인 송해와 <부산일보>의 대화는 언론과 진행한 그의 마지막 1대 1 인터뷰가 됐다. 고인을 그리는 독자들을 위해 고인의 따뜻한 마음을 담았던 당시 인터뷰를 아래에 소개한다.
“작은 일에 마음 아파하지 말고, 늘 몸 건강히 즐겁게 사셨으면 좋겠습니다.”
올해 부산국제영화제를 찾은 방송인 송해(93)는 영화 ‘송해 1927’을 선보인 뒤 이렇게 말했다. 그는 올 BIFF의 와이드앵글 섹션 다큐멘터리 경쟁 부문에 초청된 ‘송해 1927’ 주인공으로 부산을 찾았다. 관객과 대화 후 부산 해운대구 영화의전당 출연자 대기실에서 <부산일보>와 만나 “기분이 말할 수 없이 좋다. 누가 뭐래도 내가 영화제 최고상 탄 기분”이라며 함박웃음을 지었다.
■영화 ‘송해 1927’ 주인공
영화는 1927년생인 ‘방송계 대부’ 송해의 인생을 그린다. 한국 최고령 현역 방송인이자 최장수 프로그램 MC인 그의 개인사가 작품에 주로 담겼다. 송해는 “관객들을 봐서 너무 기분이 좋다”며 “영화 단역은 몇몇 해 봤는데 처음부터 끝까지 주인공인 작품은 이번이 처음”이라며 행복해했다. 그는 “처음에 출연 제안을 받았을 땐 매우 주저했다”면서 “악극단 시절부터 60여 년 가까이 대중을 만났다. 영화에선 무엇을 보여 드려야 하나 걱정을 많이 했다”고 털어놨다. 출연을 결정한 건 대중과 ‘위로’의 감정을 나누고 싶어서란다. 그는 “저보다 더 고통스럽고 아픈 기억이 있는 분도 많겠지만, 이런 이야기를 함께 나누면서 서로를 위로하고 싶었다”고 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으로는 30년 전 먼저 하늘로 보낸 아들의 노래를 처음 듣는 그의 모습을 꼽았다. 그는 “제가 (아들이)노래하는 걸 반대했었다. 연예계 생활을 아니까 더 그랬던 것 같다”며 “그 녀석이 직접 작사, 작곡해서 녹음한 노래를 처음 들어 봤다. 듣고 나니 심신을 달랠 길이 없더라”고 했다. 잠시 눈시울이 붉어진 송해는 잠깐 말을 멈춘 뒤 다시 말을 이어 갔다. “다시 한번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습니다. 부모 마음을 자식이 모른다고 하는데, 사실 부모도 자식 마음 잘 모르는 것 같아요. 크게 뉘우쳤습니다.”
영화엔 그가 고향인 황해도 재령을 그리워하는 모습도 곳곳에 담겼다. 그는 “제 고향이 아시다시피 북녘이다. 아마도 제가 살아생전 부모님의 무덤 앞에 가서 불효를 비는 기회가 있을까 싶다”며 “가서 ‘전국~ 노래자랑!’ 한번 외쳐 보는 게 꿈”이라고 말했다.
그런 그에게 부산은 ‘제2의 고향’이다. 한국 전쟁 때 고향에서 피난선을 탔던 그는 부산에 내려 삶의 터전을 일구고 생활 기반을 마련했다. 그는 “당시 피난선이었던 화물선에 3000명 정도가 타고 있었다. 그때 처음 내린 곳이 부산 북항의 화물 전용 부두”라며 “이번에 영화제 오면서 겸사겸사 부두 옆을 지났는데 감회가 새롭더라”고 했다. 그러면서 “부산에 자리 잡고 4년여간 살아서 이곳에 친구가 많다. 어딜 가다가 시간이 뜨면 늘 부산에 와서 놀다 간다. 태종대를 특히 좋아한다”고 했다. 부산의 대표 문화 행사인 BIFF와 부산국제코미디페스티벌도 즐겨 찾는단다.
아흔셋의 나이가 무색할 정도로 활력 있는 모습을 보인 그는 인터뷰 말미 관객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했다. “사람이 사람을 안 만나곤 못 삽니다. 만나면 인연이 남아야 하고, 오래오래 잘 사귀어야 하지요. 우리 영화가 여러분들 살아가시는 데 작은 위로가 됐으면 좋겠습니다.”
남유정 기자 honeybee@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