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설위원의 뉴스 요리] ‘개구리 소년’ 죽음의 진실은
30여 년 흐른 지금도 오리무중 '최악의 장기 미제 사건'
범행도구 추정 글 온라인 잇단 게재…재수사 계기 될까
대구의 초등학생 5명이 집을 나갔다가 감쪽같이 사라진 지 10여 년 만에 유골로 발견된 ‘개구리 소년 사건’. 30여 년이 흐른 지금도 범인을 잡지 못한 ‘최악의 장기 미제 사건’으로 남아 있다. 두개골에 찍힌 상흔을 감식한 전문가들의 소견 결과 사인은 타살이라는 게 대세였다. 그런데 지난 3월 ‘저체온증으로 인한 자연사’라는 당시 수사 책임자의 주장을 담은 책이 출간된 데 이어 이달 초에는 정반대로 범인과 범행 정황, 범행 도구를 구체적으로 추정하는 글이 한 온라인 커뮤니티에 올라왔다. 그 뒤로 잇따르는 공감과 반박의 글들이 온라인 공간을 뜨겁게 달구면서 이 사건은 다시 수면 위로 부상 중이다. 개구리 소년의 죽음, 진실은 무엇인가.
■ 최악의 장기 미제 사건
1991년 3월 26일은 지방자치제가 30년 만에 부활해 기초의원을 뽑는 선거일로 임시공휴일이었다. 이날 대구 달서구에 사는 초등학생 다섯 명이 집 뒤편 와룡산에 도롱뇽 알을 주우러 간다는 말을 남기고 집을 나선 뒤로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개구리 소년’은 ‘도롱뇽 알’에서 와전된 것).
아이들이 실종되자 부모들은 생업을 포기한 채 전국을 헤매 다녔다. 전국 곳곳에 아이들의 이름과 사진이 실린 전단과 포스터·현수막이 배포되고 엽서와 공중전화 카드, 우유 팩과 과자 봉지에도 이름과 사진이 찍힐 정도로 당시 ‘개구리 친구 찾기 운동’은 국민적 차원에서 펼쳐졌다. 경찰은 수사본부를 구성해 와룡산 일대는 물론 전국을 대상으로 수색 활동을 벌였는데, 단일 실종사건으로는 최대 규모인 32만 명의 인력이 투입됐다. 그런데도 소년들의 행방은 묘연했다. 지금 40~50대 이상 연령의 국민이라면 당시 온 나라가 떠들썩했던 기억이 역력할 것이다.
안타깝게도 아이들은 2002년 9월 26일 와룡산 중턱에서 유골로 발견됐다. 하지만 누가, 왜, 어떻게 죽였는지 지금도 전혀 실마리를 찾지 못한 미궁의 상태다. 개구리 소년 사건은 화성 부녀자 연쇄 살인 사건(1986~1991)의 범인 이춘재의 자백이 나온 2019년 10월 이전까지 이형호 군 유괴 살인 사건(1991)과 함께 3대 미제 사건으로 불렸다.
■ 미제 사건 중 가장 안타까운 사건
당시 아이들이 밤늦도록 집에 돌아오지 않자 가족들은 파출소로 달려가 도움을 요청했다. 하지만 경찰관 대부분 지방선거 투표장에 동원돼 여유 인력이 없다는 대답만 돌아왔다고 한다. 경찰은 뒤늦게 수사에 착수했으나 그마저 ‘단순 가출’에 초점을 맞춘 탓에 사건의 단서를 놓쳐 버린 뒤였다. 결국 아이들(시신)을 발견한 건 와룡산에서 도토리를 줍던 50대 남성이었다. 샅샅이 뒤졌다는 경찰 수사가 얼마나 부실했는지 짐작되는 대목이다.
부검을 진행한 경북대 법의학팀은 아이들의 두개골을 6개월간 감식한 결과 ‘명백한 타살’로 결론 내렸다. 다섯 아이 중 세 아이의 두개골에서 손상의 흔적이 발견됐는데 아이들이 살아있을 당시 생긴 것으로 추정된다는 내용이었다.
경찰은 범행 도구의 정체와 범인을 찾는 데 수사력을 집중했지만 끝내 밝혀진 건 없었다. 하지만 지금 관점에서는 절대 미제로 남을 사건이라 볼 수 없다. 탐지견 몇 마리만 있었어도 2002년 훨씬 이전에 범행 증거들을 발견할 수 있었을 것이고, DNA 감식 기술의 발전이 좀 더 일찍 이뤄졌더라면 범인을 잡을 가능성도 훨씬 높았을 것이다. 그래서 참으로 가슴 아픈 사건이다.
■ 수사 책임자 “타살 아닌 자연사”
그런데 당시 수사를 맡았던 김영규 대구경찰청 강력과장과 사건을 취재한 김재산 국민일보 기자가 “개구리 소년 사건의 범인은 없다”는 주장을 내놓았다. 지난 3월 발간된 책 <아이들은 왜 산에 갔을까?>를 통해서다. 30년 이상 이 사건에 매달린 두 사람의 추적 기록을 담은 책인데 지난 5월 CBS 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에 소개되면서 화제가 됐다.
책의 요지는 이렇다. ‘해가 지고 어두워진 와룡산에서 점심도 거른 채 길을 잃은 아이들이 쌀쌀한 3월 날씨에 비까지 맞아 체온이 떨어져 저체온으로 사망했다. 유골 발견 당시 손발에 묶여 있던 옷은 추워서 스스로 묶은 것이다. 두개골에 난 상흔을 바탕으로 사용된 범행 도구를 추정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나 끝내 이렇다 할 범행 도구는 확정하지 못했다. 아이들의 두개골 손상은 사후의 것으로 본다. 사망 뒤 11년이 흐르는 사이에 내린 비로 날카로운 돌들이 떨어져 생긴 골절 흔적이다.’
그동안의 수사 방향과 달라 유족들이 능히 반발할 만한 내용이다. 실종 당일 날씨도 상온 5도로 그다지 높지 않았고, 늘 뛰어다니며 놀던 뒷산에서 조난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아이들이 한 공간에 가지런히 누워 있는 것도, 옷으로 서로의 손발을 묶었다는 것도 납득하기 힘들고, 더군다나 두개골에 생긴 디귿자, 브이자, 엑스자 등 예리한 형태의 상흔이 자연석에 맞아 생길 리 없다는 주장이다.
■ “살해 도구는…” 뜨거운 온라인 공간
이런 가운데 지난 4일 한 온라인 커뮤니티에 ‘나는 개구리 소년 사건의 흉기를 알고 있다’는 글이 올라와 파장을 일으켰다. 6·1 지방선거가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 역시 예사롭지 않은데, 개구리 소년이 실종된 날도 31년 전 지방선거 일이었기 때문이다.
내용은 대단히 구체적이고 충격적이다. 글쓴이는 살해 도구가 버니어 캘리퍼스라고 주장한다. 물체의 길이를 재는 이 금속 소재의 위쪽 끝부분이 아이들의 두개골에 찍힌 흉터 모양과 유사하다는 것이 핵심이다. 누리꾼들도 “종이상자에 찍어보니 상당히 비슷한 흔적이 나온다”는 반응이다.
범인은 와룡산 근처 고등학교 불량배들인 것으로 추정했다. T자와 버니어 캘리퍼스 등을 사용하는 공업·기술 관련 고등학교 소속으로, 본드를 흡입하려고 산속에 들었다가 환각 상태로 범행을 저질렀다는 주장이다. 한 명이 아니라 여러 명이 아이들을 겁박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이수정 경기대 범죄심리학과 교수는 지난 7일 한 매체 인터뷰에서 “합리적 추론” “설득력 있다”는 견해를 밝혔다. 사건은 원래 계획성과 우발성이 섞여 있는 법이다. 이 사건의 경우 흉기 준비와 관계없이 피해자를 만난 것 자체가 우발적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를 반박하는 글들도 잇따른다. ‘버니어 갤리퍼스는 손잡이가 없어 손에 쥐고 내려치기가 불편하다. 조립식 구성이라 두개골에 자국이 나도록 여러 번 찍기에는 내구성이 떨어진다. 이 도구에 억지로 꿰맞추다 보니 공고 불량배라는 설정도 만들어진 것이다.’
또 다른 온라인 커뮤니티에는 “살해 도구가 공업용 가위(다용도 가위)”라는 새로운 주장이 올라왔고, 1991년 당시 개구리 소년과 함께 탄 남성 2명을 서울 여의도 버스 안에서 목격했다는 내용도 게재되는 등 지금 온라인 공간은 이 사안으로 뜨겁다.
한편, 경찰은 유골 발견 당시 범행 도구로 버니어 캘리퍼스가 사용됐다는 제보를 이미 받았다고 한다. 하지만 조사 결과 유골의 손상 흔적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결론이 나왔다는 것이다. 불량 학생 조사와 관련해서도 5개월간 900여 명의 행적을 살폈는데 별다른 단서는 나오지 않았다는 입장이다.
■ 깊어가는 아픔… 진실 밝혀져야
이 사건은 2006년 3월 25일 자로 공소시효가 만료됐다. 지난 4월에는 개구리 소년의 희생자 중 한 명인 김영규 군의 아버지가 끝내 사건의 진실을 알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누가, 왜 그랬는지 이유만이라도 알고 싶은 것이 유족들의 애달픈 심정이다. 이런저런 가설과 터무니없는 제보라 할지라도 유족들에겐 소중한 단서요 실낱같은 희망으로 여겨질 수 있다.
2019년 당시 경찰청장은 사건의 원점 재수사 입장을 밝힌 바 있다. 화성 부녀자 연쇄 살인 사건도 공소시효가 종료됐지만 결국 DNA로 범인을 검거했다. 개구리 소년 사건도 제대로 다시 시작해야 한다. 진실은 밝히고 억울함은 푸는 게 세상의 도리다. 더불어 사는 공동체라면 결코 외면할 수 없는 일이다.
김건수 논설위원 kswoo333@busan.com